기약 없는 어떤 시대의 산책 @서울 불광천
아마 내가 정확히 1년 전으로 돌아가서 ‘1년 전의 나’에게 한 해 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해주면, 분명 ‘별 시답잖은 헛소리나 하고 있네’ 했겠지. 겨울은 추위다운 추위도 없이 지나가더니 여름엔 장마가 54일 동안이나 이어지며, 4월 총선에선 ‘비례 위성정당’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추태가 등장하고 그런 경쟁 끝에 여당이 무려 176석을 가져가고, 연초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라는 괴이한 전염병이 전 세계를 휩쓸어 마스크 없이는 외출할 수 없게 되며, 전 세계 프로스포츠가 중단되는 난리가 벌어진 가운데 MLB의 나라 미국이 한국 프로야구에 열광하기도 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믿겠는가.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본부 부본부장은 4월 11일 정례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듭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초기에, 그러니까 이 새로운 감염병에 대한 정보가 쌓이기 전에는 ‘종식’이라는 말도 종종 언급되곤 했다. 시간이 지나고 더 많은 사례가 생기고 정보가 쌓이면서, 이제는 아무도 ‘종식’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기약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다음주, 다다음주쯤의 느낌으로 말했던 “코로나 끝나면 차 한 잔 하자~” 같은 말은, 이제는 약간 “나 건물주 되고 나면 보자~” 같은 느낌이 됐다.
특히 8월 중순 특정 종교와 특정 집회를 중심으로 대규모 재유행이 터지면서, 그럭저럭 새 세상에 적응해 살아가던 삶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건 옮을 수 있다. 그리고 내 자신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이러스의 전파자가 될 수도 있다.
적어도 당분간은 ‘주말에 뭘 할까?’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주말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여행은 언감생심이고, 산책을 한다고 해봐야 잠깐 마스크 쓰고 불광천 몇 걸음 걷는 게 전부다. 이렇게나마 일상이 유지는 된다는 것은, 사실 운이 억세게 좋은 축에 속한다. 사회의 약한 고리부터 깨부수는 게 재난의 특징이다.
23일, 전날 내린 비로 물이 불었다가 빠진 불광천엔 여느 때처럼 갖가지 새들이 와 있었다. 왜가리는 고무로 된 작은 보 아랫부분에서 멍하니 서 있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건 추측이다. 볼 때마다 그 자리에 있었는데, 가끔 해오라기나 백로가 함께하곤 했다. 23일 내가 찾았을 땐, 역시나 왜가리 한 마리가 멍하니 서 있었고, 그 주변에서 쇠백로 한 마리가 먹이를 찾고 있었다.
사실 새를 하나둘씩 알아보기 시작한 것도 코로나19 발생 이후의 일이다. 전엔 화각 답답하다며 거의 안 쓰던 망원 렌즈를 이제는 바디캡처럼 달고 다니는 것도 그렇다.
저녁 바람이 선선한 것이, 벌써 여름이 다 지나간 느낌이다. 며칠 전만 해도, 뷰파인더를 보며 가만히 서 있으면 마스크 위로 땀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곤 했다. 벌써 매미 울음소리를 귀뚜라미 소리가 대체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 감염병 사태가 여름이 오면 끝날 거라고 했었는데, 여름이 먼저 끝나가고 있다. 코로나19는 언제 끝날까?
마스크 끈을 걸어놓은 귀가 아프다.
@Boktheseon
힝구 넘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