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한 번 안 보고 여름을 보낼 순 없어서 @양평 세미원
취재 부서에 있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게 매일 메모(발제)를 올리는 것이었다. 대충 밑그림은 그려 놓아야 내가 뭘 취재하겠다 계획을 올릴 수 있는데, 천성이 게을러서 계획성도 없고 초짜라서(그런데 연차 쌓인 지금도 딱히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식견도 얕은 내가 딱딱 잘 맞춰서 참신한 아이템을 내놓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그런 고민을 조금 덜어내는 ‘쌥쌥이’ 중 하나가 달력 정독이다. 해마다 이 시기엔 뭘 하고 이 시기엔 뭘 하고… 하는 반복되는 이벤트나 주제가 있는데, 거기서 생각을 점화하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아이템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작년 재작년에 나간 기사를 그대로 복사+붙여넣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정말 지면 낭비, 데이터 낭비다!) 관점이든 사건이든 형식이든 조금이라도 새로운 뭔가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이 기본이다. 우연히라도 겹치지 않게 수년치를 찾아보고 비트는 것이다.
물론 그런 노력을 하더라도 쌥쌥이는 쌥쌥이. 달력만 보다 보면 생각이 단조로워지고, 생각이 단조로워지면 일도 단조로워지고, 일이 단조로워지면 결과물도 단조로워지기 마련. 마구잡이로라도 정보공개청구를 넣어보고, 쭉 한 바퀴 돌아 뭔가 새로운 것, 이상한 것이 없는지 눈으로 확인해 보고, 데이터를 검증해 보고, 또 머리를 쥐어뜯어 보고…
요 몇 달 동안 주말은 거의 집에 틀어박힌 채로 지냈던 것 같다. 체력도 기력도 없어서 장마철에 푹 젖은 골판지 상자마냥 축 늘어져가지고는 배달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누워서 뒹굴거리다가 게임을 하거나 트위치를 보거나 하다가 ‘아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으면 겨우 일어나서 산책 한 바퀴 돌고 들어오는 식. 분명 이것저것 내게 입력되는 색채는 훨씬 다채로워졌는데 나는 왜 받아먹기만 하고 그걸 소화하지 못하고 이러고 있나, 내 몸과 마음이 내게 요구하는 게 대체 뭐지?, 이런 생각도 하면서.
일단은 쌥쌥이라도 써서 자리에서 일어나 보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7월, 역시 연꽃 한 번쯤은 봐줘야 여름을 보낸다고 할 수 있을 터. 사실 이른 휴가 기간에 본가에 머물면서 김제 청운사의 하소백련을 잠깐 보고 왔지만, 한껏 연꽃의 향기를 맡고 오긴 했지만,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양평의 세미원. 역시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파탄의 시대, 폭염으로 곳곳에서 열차가 지연되는 통에 경의중앙선 전철 또한 몇 차례의 서행과 대기를 거쳐야 했다. 양수역에서 세미원까지 걸어가는 그 길지 않은 길도 어찌나 힘들던지. 이것은 체력 문제인가, 기후 문제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거리를 수놓은 양평 고속도로 노선 관련 현수막들(그런데 정부와 여당은 국가 재정이 들어가는 국책사업을 농담거리로 만들어놓고선 뭐가 이렇게 당당한 것인가?)을 지나 세미원으로 들어섰다.
연꽃은 물에서 피어나기 때문에 연꽃이 유명한 곳은 일단 커다란 연못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연꽃 구경은 당연히 연못가를 거니는 형식이 될 수밖에 없고, 그렇다는 건 그늘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 나는 그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양산을 챙기지 않은 바보였던 것이다. 이날 기상청 날씨누리에 기록된 양평 지역의 최고 기온은 섭씨 34.2도, 평균 운량은 3.8이었다.
그래도 햇볕을 피할 곳은 군데군데 있다. 신양수대교 밑이 대표적인데, 특히 발을 물에 담근 채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어 아무 생각 없이 쉬기 딱 좋다. 추사 김정희와 세한도를 기리는 세한정이라든지, 세미원 입구에서 쭉 연결된 징검다리 구간이라든지, 그런 그늘 공간도 있으니 양산 가져오는 걸 잊었다고 겁먹을 것까진 없으리.
이날 진짜 아쉬운 것은 양산 같은 게 아니었다. 원래 연꽃은 오전에 봐야 제맛이라고 한다. 새벽에 피어났다가 정오쯤 되면 오므라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게을러터졌기 때문에 이상적인 형태의 연꽃을 본 기억이 별로 없는데,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늦은 건 날이었을까, 시간이었을까. 날짜로 7월 말이면 늦지는 않았을 테지만, 올해는 워낙 모든 꽃이 일찍 피고 졌으니 또 모를 일이다. 아무튼 날이든 시간이든 내가 늦은 건 맞다. 그렇지만 피어있는 연꽃이 드물다고 실망할 일은 아니다. 몸을 낮춰 수련을 즐길 때다.
짝을 지어 비행하는 잠자리들 사이로 중백로(로 추정되는 새) 한 마리가 슬쩍 내려와 걷는다. 시선을 즐기는 건지, 아랑곳하지 않는 건지, 아무튼 절묘하게 사람들 사이를 지나 연못에서 연못으로 이동한다. 먹이를 찾는 듯하다. 성큼성큼 걷다가 겅중 뛰어 울타리 역할을 하는 밧줄 위로 올라앉는다. 다시 두리번거리다 내려와 연못에 한 번 고개를 박고, 그러고는 뭔가를 목으로 넘기고, 사람이 다가오면 잠깐 날아올랐다가 다시 연못가에 내려와서는… 그걸 몇 번을 반복한다.
다만 배다리 구간이 폐쇄된 탓에 세미원에서 남한강을 건너 두물머리로 갈 방법이 지금은 없으니 만약 두물머리까지 보고 싶다면 다른 동선을 생각해 봐야 하겠다. 걸려 있는 현수막을 보니 지난해 훼손(https://www.news1.kr/articles/?4590122)된 뒤 아직 복구가 이뤄지지 않은 듯하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오는 11월쯤에 새 다리가 완성될 예정(https://newsis.com/view/?id=NISX20230526_0002318422&cID=10804&pID=14000)이라는데,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다만 복원이 된다고 해도 나무로 된 옛 배다리 느낌이 아니라 FRP 소재로 놓인다고 하니, 맛은 좀 달라질 것 같다. 주탑인지 홍살문인지 뭔지 모를 빨간 구조물 위에 앉은 왜가리가 괜히 부럽다. 그냥 이대로 둬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한 바퀴를 돌아 불이문으로 돌아왔다. 마감 직전의 카페에서 팥빙수를 먹고(사실상 마시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오른다. 아무래도 좀 속이 허해서, 돌아오는 길에 막국숫집에 들러 물막국수를 곱빼기로 하나 시켜 먹었다. 동치미 국물이 시원한 것이 이제 좀 살 것 같다. 살 것 같다?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주는 근무 일정이 토요일 하루 쉬고 주 6일 일하는 일정이었으므로. 살려줘. 아니, 안 살려줘도 돼. 괜찮아. 괜찮지는 않지만 아무튼.
@bokthe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