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가을 하늘 모음 (@서울 경복궁 광화문, 덕수궁 돈덕전)
한반도에서 매년 가을 쾌청한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땅의 정말 몇 안 되는 지리적 축복 중 하나다. 오죽하면 단군도 이 무렵에 터를 잡고 조선 건국을 선언했겠는가 말이다. 기원전 2333년이면 환경오염도 공해도 없던 시절이니 하늘을 딱 봤을 때의 그 감동은 훨씬 컸을 것 아닌가. 만약 황사 때나 장마 때, 혹은 한겨울의 혹한 때였다면 단군은 필경 한반도는 단념하고 다른 매물을 보러 떠났을 것이다.
고궁 산책에 가릴 날이 있겠냐마는, 요즘은 아주 새파랗게 펼쳐진 가을 하늘과 어우러지는 맛이 또 일품이다. 특히 올해는 9월 26일 덕수궁 돈덕전, 10월 15일 광화문 월대 등 새롭게 복원 개방된 부분들이 있어서 더 새롭다. 서울 사는 사람이라면 시나브로 한 바퀴 둘러 산책할 만하다.
덕수궁 대한문도 그랬지만, 경복궁 광화문 또한 바로 앞에 대로가 지나가는 탓에 그 위용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조선 법궁의 정문이라는 상징성을 떼놓고 생각해 봐도, 이 정도 규모의 전통 건축물 정면에 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그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긴데, 애초 이 자리에 도로를 놓은 일제가 광화문을 유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복궁에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광화문을 멀리 ‘치워’버린 탓에, 나중에 군사정권이 콘크리트로 대충 ‘복원’해놓기도 하고 그랬던 것이다.
평일이었던 17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찾은 광화문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있었다. 평소처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관광객도 다수 보였지만, 나처럼 짬을 내 찾아온 인근 직장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3분의 1쯤은 되는 듯했다. 복원 공사가 막 끝난 터라 아직은 석조물에 때가 덜 묻어 약간은 이질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월대 아래에서 광화문 전체를 바라보고 서 있으면 이제야 뭔가 제대로 맞춰졌다는, 비로소 이 건축물과 이 건축물을 둘러싼 공간이 자연스러워졌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덕수궁 돈덕전을 찾은 것은 며칠 뒤였다. 돈덕전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근처 정동길에서 진행된 축제 분위기를 즐기러 나섰던 길인데, 어떻게 걷다 보니 축제 자체는 거의 건너뛰고 그냥 발길이 자연스럽게 중명전으로, 중명전에서 대한문으로, 대한문에서 돈덕전으로 향하게 됐다.
서울 도심의 은행잎은 11월 초는 돼야 완전히 샛노랗게 물들어 떨어진다. 매년 전국 노동자대회 하는 시기, 그러니까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기일 바로 전 주 정도의 은행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땅에는 노란 카펫이 깔리고, 일부는 마치 노란 나비처럼 바람에 흩날리고, 또 한 삼분의 일에서 절반 정도는 여전히 나무에 붙어 있는 때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외교 각축장이자 대한제국 절대군주정의 핵심지였던 정동길이 가장 빛나는 시기를 군부독재 시절 인권을 외치며 제 몸을 불사른 한 노동자의 기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게 어쩐지 역설적이다. 잎이 완전히 떨어지고 가로수가 앙상해질 때쯤이 을사늑약 체결일(11월 17일)이고,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가 중명전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구세군 박물관 쪽으로 쭉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보이는 서양식 건물이 돈덕전이다. 이 건물과 중명전 사이에 주한 미 대사관저가 끼어 있는 형태다. 돌담길 쪽에서 들어갈 방법은 없고, 다시 세종대로 쪽으로 나와서 대한문을 통해 들어가면 된다. 대한문 앞 월대도 최근에야 복원됐는데, 여전히 그 작은 규모와 협소한 주변 공간의 한계 때문에 ‘궁궐 정문’이라는 느낌은 바로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영국향이 진하게 첨가된 성공회 성당을 지나 대한문에서 교통카드를 찍고 들어간다. 몇 년 전부터 서울 내 궁궐에 들어갈 땐 입장권을 따로 끊을 필요가 없이 교통카드를 찍으면 돼서 편리하다. 덕수궁 입장은 천 원이면 된다. 이날은 정관헌과 즉조당 앞마당에서 외국공사 접견례 및 연회 행사도 진행되는 날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전에 한 번, 연회 끄트머리만 본 적이 있다(링크). 이런 근대식 외교 재현 행사는 대한제국 시기 법궁이었던 덕수궁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낯설면서 새롭고 즐겁다.
중화전을 지나 석조전 뒤로 넘어가면 돈덕전이 나온다. 생긴 것만 봐도 외교와 관련된 역할을 위해 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 건물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을 위해 준비한 일종의 영빈관이었다고 한다. 칭경예식을 국제 행사로 치르면서 열강의 관심을 끌고 이를 통해 중립국임을 천명한다, 라는 계획이었다는데, 어쩌면, 이게 잘만 됐다면 대한제국이 러-일 갈등의 중재자가 되고 중립국 지위를 인정받아 전화를 피해가고 강제 병탄도 안 당했을 지도 모른다, 하는 상상을 해본다. 실제로는, 국제 행사로서의 칭경예식은 그해 창궐한 콜레라로 인해 아예 열리지도 못했다. 곧 터지는 러일전쟁과 그 뒤에 따라온 을사늑약은 대한제국 외교의 숨통을 끊어놓게 된다.
개방된 공간은 2층 규모다. 1층에서는 영상 전시가, 2층에서는 대한제국의 외교사와 당대의 국제 정세를 시간 순으로 보여주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관련 자료들을 도서관처럼 정리해 놓은 아카이브실도 2층에 자리한다. 원래는 석조 건물이었지만 복원은 철골 구조로 이뤄졌다고 하는데, ‘복원’에 쓸 수 있는 자료가 너무 적어서 나중에 쉽게 고칠 수 있도록 그랬다고 한다. 1920년대에 철거됐다고 하니까 사라진 지 불과 100년밖에 안 된 것인데, 그냥 평범한 건물도 아니고 한 나라 궁궐에서 영빈관 역할을 하던 건물에 대해 남아 있는 자료가 그렇게 부족하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화성도 완벽하게 복원해 내는 ‘기록의 나라’라 더더욱.
돈덕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을 꼽으라면 2층 테라스가 아닐까. 모든 전시 공간을 둘러본 뒤 마지막으로 닿게 되는 장소면서, 회화나무와 앞마당, 석조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돈덕전이 있는 곳이 덕수궁에서도 가장 구석에 해당하는 곳이라 전망이 빼어나지는 않다. 그렇지만 중층 건물이 드문 고궁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그 자체로 뭔가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이곳의 진가가 드러나는 시기가 지금이 아닐 뿐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그 위에 눈이 살짝 쌓일 겨울날이라면.
며칠 전만 해도 ‘춥다’라는 느낌까지는 안 들고 다만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널을 뛴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쌀쌀하다, 춥다, 이런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오는 시기가 찾아왔다. 날짜가 벌써 10월 말이다. 환절기-큰 환절기-극적인 환절기, 이런 것들이 회전문으로 돌고 도는 나날 중에서도 정말 극적으로 기온이 바뀌는 때다. 아직도 여름 옷을 정리하지 못한 게으른 인간은 겨울나기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건지. 하지만, 글쎄, 또 모른다. 그래서 재밌는 거예요.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