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31. 물이 많이 불었다.
바깥은 번쩍번쩍하고, 쏴아 하고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고, 또 이따금 꽈광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쨌든 잘 자고 있었는데, 새벽 네 시쯤이었을 것이다. 삐이익 하는 익숙한 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렸다. 재난알림문자였다. 폭우로 큰 피해가 우려되니 주의하라던가 뭐라던가. 비몽사몽간이라 자세히 읽지는 못하고 알림을 끄고 다시 누웠다. 그 뒤로 두 번인가 더 알림이 왔다.
아침에는 분명히 깨 있었는데, 누워서 꾸물대다가 다시 잠들었다. 꿈속의 꿈속의 꿈까지 들어가는 요상한 꿈속을 헤매고 깨니 어쩐지 굉장히 지치는 느낌이었다. 덥지도 않은 날씨에 땀이 좀 났던 것 같다. 요즘은 꿈이 참 선명하다. 꿈이 선명하다 보면, 일하는 꿈을 꾸면 실제로 일을 한 것처럼, 뛰는 꿈을 꾸면 실제로 뛴 것처럼 피곤하다. 의학적으로 실제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기분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그런 오전을 보내고는 그럭저럭 정신을 차려서 씻고 집을 나섰다. 백수니까 뭐 달리 정해진 할 일은 없으니 하루하루 하는 일이 ‘시간 보내는’ 일이다. 작정하고 먼 길을 떠날 계제는 아니고, 그렇다고 집 안에만 있으면 다시 눕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책 두어 권 들고 카페를 찾아 나가는 것이다. 한쪽 어깨엔 카메라를 메고.
한 3분의 1쯤 남아 있던 박완서 선생님 산문집 <한 길 사람 속>을 오늘 다 읽었다. 한 달에 한 권꼴로 책을 읽어 왔는데 이번 달에만 세 권을 읽었으니 퇴사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그러고는 곽재식 작가의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를 펴들었다. 이 책은 페이지 하나하나를 그냥 읽는 이의 뇌에 꽂아넣는 느낌이다. 몇 페이지라도 읽고 보니까 뭐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 하여간, 읽다가 눈이 핑핑 돌길래 한참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계를 보니 고작 한 시간 반이 지났다. 내 집중력의 한계가 그 정도인 모양이다.
카페를 나서, 삼천변으로 걸었다. 요즘 며칠간 번둥천개, 아니 천둥번개, 아니 떤더? 떠떠떤더? 라잍닝 앤 떤더?? 떤더?????????와 함께 쏟아진 큰 비로 물이 상당히 불어 있었다. 물이 맑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구정물 냄새 심하던 그런 물보단 훨씬 나았다. 징검다리는 물에 깊이 잠겨서 건너지 마시오 어쩌고 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그냥 건널 수가 없는데 뭘 건너고 말고인가. 세차게 흐르는 소리가 좋아서 한참을 서 있었다.
물에 잠긴 풍경도 있지만, 또 물이 불어서 보이는 풍경들도 있는 법이다. 하중도에서 자란 나무는 떠내려온 풀들을 가득 안고 버티고 있었다. 또 간신히 얕은 곳에서 버틴 듯한 어떤 풀들은 떠내려온 풀과 엉켰는지 마치 이무기 같은 뭔가라도 된 것처럼 물결 따라 흐느적거렸다. 대체 저게 뭔가, 하고 쭉 보다가 그냥 웃음이 터졌다. 근데 웃긴 거 맞는 것 같은데.
불어난 물을 구경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고, 선선해진 날씨에 나처럼 산책을 나온 이도 제법 되었다. 다만 물가에 살던 동물들이 제 둥지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가 걱정이다. 중백로 가족이 둔치 풀숲에 앉아 있는 것을 봤는데, 망원 렌즈를 챙기지 않은 것이 아쉽다.
예보를 보니 단시일 내에 이 지방에 큰비가 다시 올 것 같지는 않다. 다른 지방은 어떤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