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창틀에 누워 하품하는 고양이.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이 행성은 고양이가 점령했다. @지구별고양이

창틀에 누워 하품하는 고양이.
2019.08.10.

고양이를 비롯한 털 달린 동물들의 ‘귀여움’을 한참 즐기다 보면, ‘귀여움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대체로 ‘귀여움’은 ‘무해한 대상’에게 느끼기 마련이다. 아기는 내게 치명적인 해를 줄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 ‘귀여운’ 캐릭터들은 아기와 많은 특성을 공유한다. 눈이 크고, 몸이 통통하며,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무해한)행동을 한다. 반려동물들이 인간 아기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하곤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마 포유류 동물 사이에서는 ‘귀여움’의 이미지가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어쩌면 ‘귀여움’이라는 것은 ‘무해함’을 강하게 어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잠을 자는 노란 고양이.
2019.08.10. 정말 무해해 보인다.

그런데 생각을 확장하다 보면, ‘귀여움’의 이미지가 어디까지 공유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도 던져보게 된다. 이를테면 고양잇과 동물은 야생에서는 사냥꾼이자 포식자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뛰어난 동체시력과 날렵한 몸놀림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동시에 고양잇과 동물들은 대체로 ‘귀엽다’. 물론 이것은 주관적인 느낌이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귀엽지 않을 수 있겠으나, 고양잇과 동물들에게서 ‘귀여움’을 느끼는 사람이 꽤 많은 것도 사실이다. 만약 공통의 ‘객관적인’ ‘귀여움’의 이미지라는 것이 있다면, 고양잇과 동물이 ‘귀엽게’ 생긴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사냥꾼이 귀여워서 어디다 쓸 것인가? 좀 포악하고 못되게 생겨도 괜찮지 않았을까? ‘귀여운’ 외모가 사냥당하는 동물들에게 경계심을 느슨하게 하는 효과 같은 거라도 있단 말인가? 아마 그렇진 않을 것 같다.

3색 얼룩고양이가 나비 장난감을 사냥하고 있다.
2019.08.10.

 

3색 얼룩 고양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2019.08.10. 사냥꾼.

어쨌거나, 대체로 고양잇과 동물 중에서도 몸 크기가 작은, 그러니까 인간을 직접적으로 해할 가능성이 적은 동물들은 좋든 싫든 그 ‘귀여운’ 외모로 인해 대상화되곤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 권력을 지닌 인간은 ‘귀여움’의 요소를 하나하나 뜯어 즐기고, 직접 ‘애완’한다. 그래서 이 사냥꾼이자 포식자를 집 안에 들이고, 먹이고, 쓰다듬고, 배설물을 치우고, 놀아주고(누가 누구랑 놀아주는 건지는 논의해 볼 여지가 있지만), 털을 쓸어 담는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욕심에 따른 것이다.

고양이가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2019.08.10.

‘대상화’는 곧 ‘물화’다. 숨 쉬는 동물이지만 쉽게 소유와 매매의 대상이 된다. 소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버려질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어떤 고양이는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고, 어떤 고양이는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고, 어떤 고양이는 길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고, 어떤 고양이는 집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다. 여기서 집도 길도 모두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쓰는, 인간의 공간이라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3색 얼룩 고양이가 몸을 낮추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2019.08.10.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인근 ‘지구별고양이’는 유기묘를 돌보는 곳이다. 원래는 한국외대 앞에 있었고 이름도 ‘지구정복을 꿈꾸는 고양이’였는데, 몇 년 전엔가 이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두 층에 걸쳐 좌식카페의 형태로 운영된다. 인간에게 버려진 기억을 갖고 있는 고양이들이 이 공간의 핵심이다. 더러는 준비가 된 사람에게 입양을 보내기도 한다는 모양. 한 번 인간에게 상처를 받은 동물들이 두 번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라면 조금 죄책감이 덜한 채로 고양이들과 놀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래서,

귀여움이란 무엇인가?

@Bokthe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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