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 서울시립미술관.

2000년대 초반에는 ‘필카’라는 말이 따로 없었다. ‘카메라’라고 하면 대개 ‘필름카메라’를 가리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디지털카메라’는 특별히 ‘디지털카메라’나 ‘디카’라고 불렀다. ‘카메라 달린 휴대폰’이 보편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렇게 보급된 ‘폰카’의 성능이라는 것도 조악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쓰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방학 과제 때에도, 수학여행 때에도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썼다. 그땐 ‘셀카’라는 단어도 못 들어봤던 것 같다. 자기 얼굴 사진이 필요하면 근처 PC방에 가 ‘하두리’ 캠을 이용하는 게 당연했던 시절 얘기다.

동네 슈퍼나 편의점에서 사진용 필름을 팔지 않기 시작하더니, 동네 사진관도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남은 사진관도 필름 현상에서 손을 떼는 경우가 늘어났다. 아그파는 망했고, 코닥도 파산했다. 그러는 사이에 일회용 필름카메라도 그냥 ‘옛날이야기’ 속 물건이 됐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턴가 상황이 바뀌었다. 필름카메라를 쓰는 이가 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급기야는 ‘폰카’ 사진을 필름사진 풍으로 보정해주는 ‘구닥’ 같은 애플리케이션도 생겨났다. 언론은 이를 ‘뉴트로’라고 지칭했다.

일회용 필름카메라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옛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옛날엔 ‘기록을 위해’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썼는데 지금은 ‘재미를 위해’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쓴다는 점이다. 아마 2018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된 유민영 에이케이스 대표를 업무와 관련해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필름사진이 ‘옛날의 것’이 아니라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무슨 거창한 이유는 필요 없다. 재미있으면 된다.

2019.10. 서울 중구 필름로그.

필름로그라는 곳에서 ‘필름자판기 설치’를 위해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했다. 펀딩 참여 리워드로 ‘업사이클 카메라’라는 것을 걸었는데, 이는 다 쓴 일회용 필름카메라에 새 필름을 감은 것이었다. 현상/스캔 비용 포함. 포트라 800 필름을 장착했는데, 계산해보면 그냥 필름 값으로만 쳐도 얼추 그 값이 된다고 생각했다.

필름로그 텀블벅 펀딩.

몸체는 그냥 평범한 일회용 필름카메라(코닥 펀세이버)다. 렌즈도 그냥 플라스틱 조각이고, 노출을 조절할 수 있는 어떤 장치도 없다. 셔터속도와 조리개 수치 표시도 없는데, 대충 1/100s 전후에 F/9~10 정도로 추정된다. 실내에서 쓰기엔 다소 무리가 있고, 구름 많은 날의 야외 정도에 어울릴 것 같다. 렌즈의 화각은 무난한 광각계 정도로 보인다. 폰카와 비슷한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펀세이버 원본이 27컷인데 반해 업사이클 카메라는 36컷을 찍을 수 있다. 그래서 28번째 컷부터는 카운터가 1부터 다시 돌아간다.

필름로그 업사이클 카메라.

펀딩에 참여하고서 잊고 있다가(원래 텀블벅 밀어주기는 이런 맛에 하는 것이다), 6월 하순 즈음에 카메라를 받았다. 이걸 한참이나 고이 모셔두고만 있다가 10월이 되어서야 현상을 했으니(그것도 다 쓰질 못하고 현상소 앞에 가서 몇 컷을 낭비했다), 내 게으름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게 된다. 역시 나는 필름카메라 체질은 아닌 모양이다. 필름 한 통에 계절의 변화를 그대로 담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

2019.06. 첫 컷. 경희궁.

주변부 화질은 형편없다. 당연한 얘기다. 사진이 뿌옇게 나왔는데, 이게 역광이라서 그런 것인지 노출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렌즈 성능은 조악하고, 노출 제어는 불가능하다. 그냥 이렇게 쓰는 카메라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톱니를 돌리고 셔터를 누르면 그냥 아무 사진이나 나오는 카메라다. 가챠? 랜덤박스?

2019.06? 독립문 공원. 정말로 ‘아무 사진’이나 찍은 것.

이 카메라의 매력은 그 ‘의외성’에 있다. 의도하고 찍어서 의도한 대로 결과물이 나오는 사진은 디지털카메라로 만들 수 있다. 손에 들고 있는 폰카만 해도 그 성능이 과거의 ‘디카’보다 훌륭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면 셔터속도, 조리갯값, 감도를 조절할 수 있다. 물론 원하는 사진이 찍는 족족 찍혀 나올 리는 없겠지만, 정확하게 ‘잘’ 찍는다는 게 목표라는 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2019.07? 퇴근길 노을.

이 카메라는 다르다. 애초에 ‘잘’ 찍을 수가 없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잘’ 찍을 수는 있지만, 그건 카메라 외부의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니, 촬영자는 온전히 그 외부 상황에만 신경 쓰면 된다. 뷰파인더에 보이는 것은 실제 찍히는 영역과 시차가 있기 때문에, 뷰파인더는 화각을 가늠하는 정도로만 쓰자. 주변을 살피고 시선을 어떻게 할지만 생각하자.

2019.10. 놀이터.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작고 가벼워서 아무 데나 들고 다니기 편하다는 점 정도가 있겠다. 사용할 때 소리도 거의 나지 않는다. 톱니바퀴를 돌릴 때나 셔터를 누를 때 작은 소리가 나지만, 바로 옆에 있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수준이다. 아, 한 가지 잊어버린 것. 플래시가 달려 있는데, 36컷을 찍는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이유는, 신뢰가 가지 않아서? 그 와중에도 ‘잘’ 찍고 싶었나보다.

2019.10. 수직, 하늘.

36컷을 다 찍고 나면 그대로 필름로그에 가져가면 된다. 토요일에도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한다. 스캔된 사진은 홈페이지(http://filmlog.co.kr)에서 받을 수 있다.

2019.10. 마지막 컷. 이 컷 뒤에 셀카를 한 컷 찍었는데, 필름이 여기서 끝났다. 다행이다(?).

재미있다. 잘 놀았다. 그러면 됐지 뭘. ‘잘’ 찍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것 없다.

@moragoheya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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