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2. 경의선 숲길 가운데 ‘책거리’ 구간.

매일같이 지하철을 이용하지만, 볼 때마다 신기한 것이 철도다. 1435mm 간격으로 평행하게 놓인 철제 레일 한 쌍, 언뜻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또 어떻게 보면 참 위태로운 시설처럼 보인다. 왕복 6차선, 8차선씩 하는 차도와 비교하면 왜소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길게는 수백km까지 뻗어 나가는 이 선로 위에 대차를 걸쳐놓기만 하면, 시속 300km로 달리는 고속열차도 수백 톤의 원자재를 실어나르는 화물열차도 쌩쌩 잘도 달린다.

시대에 따라 전선이 설치되기도 하고, 신호설비가 바뀌기도 하고, 선로전환기가 업그레이드되기도 한다. 레일 밑에는 침목이 깔리기도, 콘크리트가 깔리기도 한다. 가운데에 자갈이 채워져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바로 정확하게 간격을 맞춰 평행하게 늘어선 레일 그 자체다.(각종 경전철이나 신교통수단은 고려하지 말기로 하자.) 1899년 경인선 개통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요소다. 그래서 그럴까. 인간이 만든 많은 기반시설이 언젠가는 버려지지만, 유독 버려진 철길만은, 볼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된다. 수십 년 전 흑백사진 속에서 내가 아는 것들을 하나씩 발견하는 것과도 같은, 그런 재미가 있다.

2020.01.12. 경의선 숲길 공덕역 구간.

용산선은 1905년 경의선이 처음 개통될 적의 본선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것이 1921년에 서울역과 서소문, 신촌을 거쳐 북쪽으로 돌아가는 노선이 새로 개통되면서, 경의선의 지선으로 전락하게 된다. 한때 ‘경성순환열차’가 달리면서 승객을 꽤 실어나른 모양이지만, 이것도 일제강점기 말기에 운행이 중단됐다. 이 철길은 나중에는 주로 당인리발전소에 무연탄을 실어나르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무연탄을 쓰던 당인리발전소 1~3호기 폐쇄 이후 한동안 세간의 기억에서 사실상 지워졌던 용산선은, 구십여 년이 지나 ‘경의중앙선’이라는 이름의 광역전철 노선으로 부활(?)했다. 사실 완전히 죽은 적은 없으니 ‘부활’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함이 있지만. 지금 지상에 남아있는 흔적은 그 용산선이 벗어놓은 허물 같은 것이다.

경의선 숲길은 용산선의 거의 모든 구간을 공원으로 꾸며놓은 공간이다. ‘거의 모든 구간’이라는 것은 군데군데 끊긴 부분이 있기 때문인데, 용산역에서 효창공원앞역 사이, 선로가 지하로 완전히 들어가기 전까지 구간이나 공덕역 인근 일부가 그렇다.

2020.01.12. 경의선 공유지.

공덕역 인근 구간이 끊겨 있는 이유는 물론 개발 때문이다. 서울에서 땅값·집값 오르는 것으로 핫한 ‘마용성’의 ‘마’, 그 핵심이 이 인근이다. 이 금싸라기 땅을 자본이 놔둘 리가 없다. 이랜드가 나섰다. 2012년, ‘이랜드공덕’이 출범하고 개발에 착수했다. 솔직히 8년이라는 세월이, 특정 자본이 독점하도록 와꾸 짠 거 아닙니까? 시민들은 단절된 공간을 ‘공유지’로 돌려놓기 위해 뭉쳤다. 그 현장이 ‘경의선 공유지’다. 이날은 시나브로 산책이나 조금 할까 하는 느낌으로 이 공유지에서 출발했다.

경의선 숲길은 광장처럼 꾸며진 구간과 숲길 구간이 번갈아 배치돼 있다. 공덕역에서 출발해 조금 걷다 보니 적당히 울창한 숲이 산책로 옆으로 다가왔다. ‘철도 부지’라는 이름이 주는 어떤 직선적인 인상과는 달리, 숲길 구간의 산책로는 마치 등산로처럼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이뤄져 있다. 봄에, 한 4~5월께 돼서 오면 참 예쁘겠다고 생각했다.

2020.01.12. 경의선 숲길.

사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옛 철길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군데군데서 레일이나 관련 구조물을 만날 수는 있지만, 지나치게 소극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레일의 경우, 산책로를 조성하면서 바닥에 원형을 남겨둘 수 있었을 텐데, 대부분 구간에서는 볼 수 없었다. 서강역 같은 건물은 원래 모습 그대로는 아니라도 비슷하게 복원해서 세워둘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옛 서강역이 있던 자리는 광역전철 경의중앙선 서강대역 광장으로 휑하니 남아있다. 한 번 철도 부지가 영원한 철도 부지로 남기를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경의선’이라는 이름을 차용한 곳이라면 그 흔적을 좀 더 적극적으로 살려둘 수는 없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2020.01.12. 서울 지하철 6호선 대흥역 인근의 ‘간이역’ 구조물.

중간중간에 간이역의 이미지를 활용한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이런 것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나치게 정형화된 무언가라서 아쉽다고 해야 할지. 어쩌면 그 ‘정형화된’ 이미지가 폐철도부지 공원화 후발주자들이 남발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2020.01.12. 경의중앙선 서강대역 인근 건널목.

2020.01.12. 경의중앙선 서강대역 인근, 간이역 플랫폼을 형상화한 벤치.

2020.01.12. 경의중앙선 서강대역 인근의 녹슨 선로전환기.

2020.01.12. 경의중앙선 서강대역과 홍대입구역 사이. 공덕 쪽을 바라본 모습.

2020.01.12. 운행 중인 비둘기호 열차?

경의선 숲길은 홍대입구역 근처에 오면 ‘책거리’라는 이름을 새로 얻는다. ‘책거리’라고 하면 사실 ‘책+거리(街)’보다는 어릴 적에 학교나 학원에서 책 한 권을 다 뗄 때 했던 조그만 파티 같은 것이 먼저 생각난다. 요새도 그런 걸 하나? 종강 뒤풀이 같은 건 하는 것 같은데, 그걸 ‘책거리’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이곳은 그 ‘책거리’가 아니라 ‘책+거리(街)’다. 1년에 312일 저자와 만날 수 있다고 하는데, 365일 중 일요일을 제외하면 대충 312일 언저리라서 그렇다고 한다. 이날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저자를 만날 수 없는 53일 중 하루가 되고 말았다.

2020.01.12. 경의선 책거리.

와우고가차도 아래엔 철길과 플랫폼이 놓여 있다. 이곳은 옛 세교리역 자리에서 약간 못 미친 곳인데, 서강역과 세교리역 사이의 ‘책거리역’이 테마인 것 같다. 역명판과 역사까지 재현해 놓았다. 이 정도면 그래도 꽤 신경을 쓴 것 같다. 고가차도 바로 아래라서 조금 어두침침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쉽다. 옛 세교리역 자리에 세워놓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자리에는 열차를 형상화한 책 관련 부스들이 서 있다.

한편 이 공원과 주변에는 고양이가 많이 산다. 공원 옆 카페 지붕 위에도 고양이가 있고, 수로(겨울이라 물은 없다)에도 고양이가 있고, 그냥 햇볕 드는 땅바닥에도 고양이가 있다. 다른 곳의 길고양이들과는 달리 사람을 봐도 황급히 도망치거나 하진 않는다. 지난해 30대 남성이 이 부근에서 고양이를 학대해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도. 그래도 아직은 인간이 밉지는 않은 걸까. 저 조그만 털북숭이 동물에겐 아무 죄가 없다.

2020.01.12. 비둘기를 쫓던 고양이. 한참을 노려보다 달려들었지만, 비둘기가 한 박자 빨랐다. 오른쪽 그림자가 그 비둘기의 것이다.

2020.01.12. 풀숲의 고양이.

2020.01.12. 햇볕 쬐는 고양이.

2020.01.12. 인간을 관찰하는 고양이.

2020.01.12. 갈 길이 바쁜 고양이.

홍대입구역에 도착하면서 이날의 산책을 마쳤다. 근처 알디프에서 차도 한 잔 사 마셨다. 역시 겨울엔 뜨끈하니 마실 것이 좋다.

@moragoheya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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