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글쓰기의 기쁨과 슬픔: 일요일의 궁궐 산책과 밀린 일기

  • 무엇을 쓸까 고민하는 것이 가장 어려워
  • 취재와 글쓰기는 일대일 대응 관계 아냐
  • 일요일이 지나면 월요일… 고통은 영원
2021.05.30. 서울 창덕궁 승화루.

취재기자 시절, 선배들은 종종 이런 말을 했다. “기자라는 직업은 정말 좋은 직업이다, 단, 기사만 안 쓰면.” 누구라도 만나 질문을 던질 수 있고 어디라도 돌아다니고 체험할 수 있는 ‘직업’이 또 어디 있겠냐는, 그렇지만 기사를 쓰는 것은 늘 힘들다는, 그런 얘기. 물론 그땐 ‘무슨 선배들이 후배 앞에서 그런 얘기를 다 한담?’ 했지만, 그리고 그때는 기사 쓰는 일이 퍽 기꺼웠지만, 이제는 안다. 일생에서 그렇게 뻗댈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은 언젠가는 지치게 돼 있다는 것을.

글쓰기의 첫 단계이자 가장 어려운 단계가 ‘뭐 쓰지?’의 단계일 거라고 확신한다. 취재기자 시절,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바로 ‘아침 메모’였다. 다른 회사에선 ‘발제’라고도 한다던데, 뭐, 아무튼. 기사를 한 꼭지를 쓰더라도 사회에 필요한 주제, 의미가 있는 주제를 써야 하는데, 이걸 매일 골라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 단위로 끊어지는 일간신문에서는 매일 기복 없이 가는 것이 중요하지, 하루 그럴듯하게 쓰고 며칠 잠잠한 식이면 곤란하니까, 그러면서도 남들보단 조금이라도 더 눈에 띄어야 하니까. 더는 취재기자가 아니게 됐을 때, ‘뭘 쓰지?’ 하는 질문을 매일 하지 않게 된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이러다 긴 글을 아예 못 쓰게 돼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거의 년 단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무슨 전문분야도 없는 사람이 사실상 유일한 ‘할 줄 아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공포. 그리 단단하지도 않은 ‘직업’에 자아를 의탁한 자의 말로. 블로그에 쓰는 글이라도 좀 신경 써서 써야겠구나 하고 생각한 건 그래서였다. 스스로 일종의 기획기사 시리즈물을 쓰고 있는 거라고 최면을 걸고 마치 마감시일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압박을 넣으면 일단 마음이 불편해져서라도 기어이 글을 쓰고 만다. 어차피 주말마다 산책은 나가니까 소재 자체가 ‘없어서’ 글을 못 쓰는 일은 (이론상) 생기지 않는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 한 3주쯤 전의 일이고, 그 기간에 단 한 편도 새로운 글을 쓰지 못했다. 단지 140자도 안 되는 글을 쓰면서도 주술호응을 못 맞추는 시대의 일원이 될 뿐이었다.

2021.05.30. 서울 창덕궁.

지난달의 마지막 주말, 토요일과 일요일은 극과 극으로 대비되는 이틀이었다. 토요일엔 집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이것이 진정한 이 시대의 히키코모리, 사회적 거리 두기형 인간의 마음가짐이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던 게, 밖에 비는 오지, 잠은 계속 몰려오지, 딱히 뭘 하겠다 하는 목표의식도 없지, 그럼 그냥 허송세월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중요하다는 것은 크롬 레디오스 경도 인정하는 바지만.

일요일엔 겨우 기운을 차려 창덕궁과 창경궁을 찾았다. 역시 날 좋은 주말이라 그런지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이 보였다. 굳이 궁궐을 찾은 것은 궁궐 그 자체에 큰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 안에 사는 동식물들이 궁금해서였다. 특히 새 종류와 고양이가 궁금했다. 비원 입장이 이미 마감된 상황이었던 터라, 창덕궁 영역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창경궁 영역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넘어가자마자 만난 것은 직박구리 한 마리. 사람 다니는 길 바로 옆에서 부산을 떨고 있었는데, 잠시 후에, 날다가 부주의했는지 담장에 살짝 부딪히고는 화들짝 놀라 예의 그 ‘끼에엑-‘ 하는 소리를 내며 멀리 날아갔다.

2021.05.30. “끼에에엑”

 

2021.05.30.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길에서 내려다 본 창경궁. 아마도 통명전인 듯하다.

5월 말이면, 봄이라기보단 여름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절기상으론 ‘입하’를 한참 넘겼고, 기온도 한낮이면 섭씨 25도를 넘나든다. 사람들의 옷소매도 이 무렵이면 팔꿈치 언저리까지 올라가게 마련이다. 올해는 앞서 4월께 ‘이른 더위’라는 말도 들었던 터라 당연히 평소보다 더 일찍 더워지겠거니 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5월 말에 ‘춥다’는 말을 낮에 일상적으로 했던 해가 또 있었나? 그게 28일 금요일 퇴근 때 동료와 나눈 대화 내용이었다. 29일만 해도 낮 최고기온이 섭씨 19.1도(서울 기준)에 불과했으니. 일요일인 30일은 날씨가 화창했고, 적당히 ‘5월 말 같은’ 분위기가 났다. 아침저녁은 쌀쌀했지만.

성종 태실비가 있는 언덕길을 지난다. 길 옆으론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졌는데, 틈새로 흘러나오는 한 줌의 햇빛을 받으려고 이파리가 마치 계단식 논처럼 층층으로 나 있었다. 그 길로 내려오면 창경궁 산책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춘당지가 코앞이다. 수초가 무성하게 올라온 연못은 커다란 잉어들이 주인이다. 어린이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선 “엄청 크다~” 같은 감탄사를 내놓는다. 어린이뿐이었을까. 연못가를 걸으면서 잉어를 바라보며 한 마디씩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종의 경외심을 품게 되는 모양이다. 그 잉어떼를 향해 작은 돌조각을 던지는 못된 인간(제발 동물을 괴롭히지 좀 말자, 인간들아)도 있었지만.

2021.05.30. 계단식 논 같은 구조의 나무.

지난해 늦가을에 본 원앙들은 지금은 다들 흩어진 모양이다. 어미 한 마리와 새끼 몇 마리가 수면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잿빛의 수수한 깃털을 입고 있던 터라 사실 처음엔 ‘원앙’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무리 번식기와 아닐 때가 다르고 수컷과 암컷이 다르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이야. 새끼들도 영락없이 솜털 부숭부숭한 새끼오리처럼 생겨서 깜빡 속았지 뭐야. 연못가 돌 위엔 턱시도 고양이 한 마리가 식빵을 굽고 있다. 세상 모든 것에 달관한 듯한 표정이다.

2021.05.30. 원앙과 새끼.

 

2021.05.30. 새끼 원앙.

 

2021.05.30. 연못가의 고양이.

대온실은 닫혀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또 열려 있었다. 이게 무슨 ‘열림교회 닫힘’ 같은 소리냐 하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방문객의 입장은 금지돼 있지만, 대신 창문을 전부 열어놓은 것이다. 열린 창문으로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면 내부의 꽃과 나무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 원래 실내 사진 촬영이 (원칙적으로는)금지돼 있었으니 어쩌면 이쪽이 더 나은 것일 수도 있다.

2021.05.30. 고양이

 

2021.05.30. 하품

 

2021.05.30. 쩝쩝

 

2021.05.30. 창경궁 대온실.

 

2021.05.30. 애옹?

온실 근처엔, 역시나 고양이들이 있다.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많은 이의 관심과 애정을 받아내고 있다. 삼색이 한 마리가 창틀을 타고 모델워킹을 선보이다 폴짝 뛰어 내려간다. 이날 만난 고양이는 모두 네 마리. 이 가운데 숙종의 애묘 금손이의 자손이 있을까? 그건 뭐 알 수 없다.

창경궁 산책은 금천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로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어 참 좋다. 여운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서울 도심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동아시아 유교 왕국의 궁궐 정문으로서는 다소 특이하게 남쪽이 아닌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홍화문을 나선다. 거리와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뻐꾸기 소리가 잠깐 울렸다가 사라진다.

갑자기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그 다음날인 5월 31일은 월요일이었다. 분명 7일 전에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이 무슨 영원한 7일의 도시란 말인가. 그런데 이것 말고도 쓸 이야기가 밀려 있다. 역시 글을 쓰려면 그때그때 정리를 잘 해둬야 하는 것이다.

2021.05.30.

@boktheseon

1 COMMENTS

LEAVE A RESPONSE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