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유효기간 13년의 ‘제국’을 생각함 @덕수궁

2019.09.29. 덕수궁 석조전.

서울에 남아있는 조선 시대 궁궐을 보면, 이곳이 한 나라의 왕이 기거하던 관저이자 국정이 이뤄지던 중앙 관청 역할을 했던 곳이라기엔 지나치게 작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제일 심한 게 숭정전과 태령전 정도만 덜렁 있는 경희궁인데, 그렇게 된 이유야 물론 일제강점기 때 무자비한 훼손이 이뤄진 탓이다.

2019.09.29. 덕수궁 중화전.

‘기구한 운명’이라는 면에서 따지자면 (사실 조선 시대 어느 궁궐이 안 그랬겠냐만은)덕수궁도 물론 만만치 않다. 월산대군의 집터에서 시작해 임진왜란 때 잠시 피난처로 쓰이다가 대한제국 선포 무렵에야 제대로 된 ‘궁궐’로 거듭났지만 1904년에 불이 나서 다 소실되고 재건되었다가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여기저기가 뜯어져 나갔다. 대한문은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신세였고, 중화문은 좌우 행각을 잃어버린 채 혼자 덜렁 서 있다.

건물 양식도 중구난방이어서, 어떤 것은 일반적인 조선 궁궐 양식이지만(중화전 등) 어떤 것은 서양의 신고전주의를 따랐고(석조전), 또 어떤 것은 러시아 스타일과 한옥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섞이기도(정관헌) 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돌담길 너머 외따로 자리한 중명전도 덕수궁의 일부다. 축선도 멋대로다. 석조전은 정남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중화전·함녕전 등은 남남서쪽으로 비스듬히 서 있다.

2019.09.29. 덕수궁 정관헌.

앞서 적은 것처럼, 덕수궁이 제대로 된 ‘궁궐’로 거듭난 것은 대한제국 선포 무렵이다. 한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절’을 꼽으라면 모르긴 몰라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시대. 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이 옆구리 쿡쿡 찔러대며 이권을 챙겨가던 시절이었다. 이 ‘중구난방’의 건축 속에는, 세계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길을 찾아 헤매던 근대화 후발국가의 몸부림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2019.09.29. 덕수궁 중화전과 준명당, 석조전.
2019.09.29. 덕수궁 덕홍전 옆길.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그리고 아관파천의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이 ‘제국’은 태생적으로 외교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기회라는 게 있잖습니까. 덕수궁 정관헌과 그 앞뜰에서 진행되는 ‘외국공사 접견례’ 재현 행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시기 대한제국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올해는 9월 29일로 마감됐는데, 아마 내년에도 할 것이다.

2019.09.29. 덕수궁에서 진행된 외국공사 접견례 연회.

나는 시간이 맞지 않아 연회 행사의 마지막 순서인 ‘포구락’ 장면만 잠깐 볼 수 있었다. 무희들이 춤을 추다가 나무판에 뚫린 구멍으로 공 같은 것을 집어넣는 일종의 게임인데, 그냥 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직접 하는 입장에선 어려운 모양이다. 나야 안 해봤으니 모를 일이다.

2019.09.29. 포구락 장면. 이런 식으로 던져 넣는다.
2019.09.29. 성공하면 꽃을 받고
2019.09.29. 실패하면 얼굴에 먹칠을 받는다.
2019.09.29. 그리고 이를 관전하는 외국공사 부부들. 국적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2019.09.29. 포토타임을 위해 내려오는 외국공사 부부들.
2019.09.29. 포토타임!
2019.09.29. 퇴근 중…

연회를 보고 나서, 궁궐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석조전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황제의 식탁’ 전이 진행(~11월 24일)되고 있다. 대한제국 시절, 고종·순종 황제는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식기는 뭘 썼는지, 외교관들이 찾아오면 무엇을 대접했는지 등을 나열해 놓았다. 전시 중에 나오는 ‘이빨 달린 숟가락’은 아마도 포크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고. 특히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 루즈벨트에게 대접한 내용이 상세히 전시돼 있다. 음식을 직접 맛보고 싶다면 쿠킹클래스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되는 모양이다.

2019.09.29. 연회장에 재현된 식탁.

때가 늦어서였는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막혀 있었다. 전시 자체 규모는 크지 않기 때문에, 전시만 둘러보려고 한다면 30여 분 정도면 될 것 같다.

2019.09.29. 덕수궁 석조전.
2019.09.29. 덕수궁 석조전.

그런 외교적 노력의 결말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영화의 신 김성수가 남긴 ‘오래전에 매장당한 영화(감독 본인의 표현)’ <아수라>에 나온 표현을 빌자면, 그 결말이란 게 대충 이렇다.

“마지막 기회라는 게 있잖습니까.”

“없어 이 xx… 잘 봐. 네 팔 싹둑?(을사늑약, 한일병탄 강요)”

명색이 ‘제국’인데, 칭제건원으로부터 고작 13년 존속하다 허망하게 국권을 넘겨줘야 할 운명이라는 걸 당시 사람들은 알았을까? <아수라>에서 한도경이 그랬던 것처럼, 사실 알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윤희는 아직 살아있지만(Yunhee still alive), 그냥 살아만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청, 러시아제국마저 전쟁으로 굴복시킨 일본에 어떻게 해야 맞설 수 있었을까? 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역사에 가정은 없고, 그건 지금은 알 수 없겠다. 다른 어떤 평행우주에서라면 몰라도.

2019.09.29. 덕수궁 중화전.

어쨌든 지금 이 땅에 있는 것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고, 옛날 전제왕권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그 기능을 잃었다. 그리고 일본은 전범국가로서의 과거를 잊어버렸는지 되도 않는 시비를 계속 걸고 있다. 그런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성공하겠습니까? 새 인생 새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2019.09.29. 덕수궁 중화전 앞.

옛 궁궐은 국가원수의 관저이자 국가 중앙 관청으로서의 기능은 잃어버렸지만, 어떤 것은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문화재’라는 것이 대개 그렇다. 지금 서울 한복판에서 백 년도 더 된 시대를 떠올릴 수 있는 것도, 그 시절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도 다 주인 잃은 궁궐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Boktheseon

2 COMMENTS

  1. 제 최애 드라마가 얼렁뚱땅 흥신소인데 배경이 덕수궁이에요 ㅠㅠ 덕수궁 중명전이요 ㅠㅠㅠ 그래서 아직도 덕수궁만 보면 두근두근해요 ㅠㅠㅠ ♥︎ 사진 넘 잘봤어요 ㅜㅜㅜㅜ 감사합니다 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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