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불광천 벚꽃길
언제까지 ‘물리적 거리 두기’를 계속해야 할지, 아무 기약도 없이 날짜만 넘어간다. 한국이 비교적 일찍 (상대적으로)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이지, 유럽과 미국, 일본 등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흉흉한 말이 나온다. ‘잠시 멈춤’은 2주에 연기(최종), 연기(최최종)를 거쳐 두 달이 넘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벚꽃은 일찍도 피어서, 이제 막 4월에 들어섰을 뿐인데도 벌써 만개했다. 아무래도 목련과 벚꽃이 같이 피고 같이 질 모양이다. 처돌이는 처돌지 않았지만 기후는 확실히 처돌아버렸다고 하네요.
전국의 ‘벚꽃 명소’들은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는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물론 코로나19(COVID-19) 확산을 막기 위해서다. 지난해 서울 여의도 벚꽃축제 당시 여의서로, 그러니까 흔히 ‘윤중로 벚꽃길’이라고 부르는 곳을 다녀간 사람이 532만 명이었고, 송파구 석촌호수 인근에도 500만여 명이 몰렸다(기사). 군항제가 열린 경남 창원 진해에도 400만여 명이 방문했다(기사). 이 ‘대목’을 포기하고서라도 감염병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반드시 ‘일상’을 되찾고 말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막막하다. OECD 회원국 중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의,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권에서 할 수 있는 게 ‘거리 두기’뿐이라니. 우중충한 겨울을 견딘 보상처럼 주어지던 봄날 꽃놀이가, 꽃샘추위와 황사와 미세먼지와 이른 더위 사이의 며칠 되지도 않는 그 좋은 날이,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나게 생긴 것이다. 사람 별로 없을 시간대를 골라서 마스크를 쓰고 나가 잠깐 산책하는 게 고작이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빼놓지 않고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게 그나마 약간의 위안이 된다. 저 사람도 나와 같구나.
물론 이 ‘거리 두기’도 벚꽃에서 끝날 것 같지도 않다. 벚꽃 다음은 겹벚꽃, 철쭉, 영산홍, 그리고 그다음 피는 장미까지 해서 줄줄이 ‘나가리’될 것이 확실시된다. 지난 겨울날이 덜 추웠던 탓일까. 집에서 창밖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좀이 쑤실 수가 없다. 오랫동안 나를 ‘인도어(in door)파’라고 생각해 왔지만, 그건 허상이었다. 나는 출근하는 것과 사람 만나는 게 싫은 거지 외출이 싫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의 말에 따르면, 코로나19는 ‘종식’될 성격의 병조차도 아니다(기사). 어찌어찌 여름쯤 돼서 사태가 어느 정도 정리된다고 쳐도, 그땐 놀러 갈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노동자가 한 해 쉴 수 있는 날이 빤한데, 한 번 여행 갈 것을 두 번, 세 번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봄에 (타의로)쉬었으니 여름휴가는 반납하자’고 옆구리를 찌르는 일이 생길 가능성이 훨씬 높다. 지금 무너지는 관광업계는 한동안은 재기(사전적 의미)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니 어찌 막막하지 않을 수 있을까.
꽃 피고 볕 좋은 여의도 한강공원에, 겨우 주말에 몇 시간 여유 짜내서 무슨 바둑판에 띄엄띄엄 둔 바둑돌마냥 몇 미터씩 떨어져서 ‘거리 두기’를 의식하며 앉아 있는 상춘객들 모습(기사)이 씁쓸하다. 그리고 그럴 여유조차도 갖지 못하고 방역 최전선에서 온몸을 부딪쳐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씁쓸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말하는 쪽의 답답함도, “당연하지 임마;; 이렇게 해도 모자라다고;;” 하는 쪽의 절박함도 이해가 된다. 아예 사람들의 외출 자체를 막고 있는 유럽이나 미국의 상황을 보면 더더욱 씁쓸하다.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면서 일상이 그럭저럭 유지되는’ 건 한국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럭저럭 유지되는 일상’도 이렇게 답답한데, 저기는 대체 어떨까.
존버는 승리한다. 이 말은 참이다. 그러나 누구나 존버하면 승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버틸 수 있는 여력이 되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다. 승리의 그날까지 존버가 안 된다면, 그것은 버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더 버틸 수 있으려면 뭘 해야 할까. 무엇이 필요할까.
‘거리 두기’ 분야의 인류사 올타임 레전드라 할 수 있는 암굴왕 에드몽 당테스(몽테크리스토 백작)는 말했다.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Bokthe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