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사람과 사람, 그 사이 적당한 거리란 @불광천 벚꽃길

2020.03.28. 서울 불광천.

모처럼 ‘생존요리’ 말고 요리다운 요리를 해보려고 요리법을 찾아 따라 하다 보면 틀림없이 만나는 관문이 있다. ‘적당’의 관문이다. 소금을 적당량 넣으시오. 적당히 달궈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재료를 적당히 노릇노릇해질 때까지 볶으시오. 재료가 적당히 숨이 죽으면 물을 적당량 붓고 적당히 걸쭉해질 때까지 가열하시오. 정도에 알맞고, 엇비슷하게 요령이 있어야 한다. ‘알맞은 정도’가 무엇인지, 그 ‘요령’이란 게 뭔지는 그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익스큐-즈가 된” 것일 터다.

2020.03.28. 서울 불광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라는 건, 어느 정도일까. 코로나19(COVID-19) 방역의 관점에서는 대략 2m 정도로 정리되는 것 같다. 주로 재채기나 말을 할 때 나오는 침방울로 전파되는 이 바이러스의 특성상,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면 침이 튈 수 있는 범위 바깥에서 대화하는 게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이러스가 있을 수도 있는 신체 부위가 서로 닿는 경우도 위험하다고 하니까, 대략 팔을 뻗어도 닿지 않는 정도의 거리를 확보하면 대충 ‘안전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손잡이 같은 것을 매개로 감염되는 수도 있으니, 모두가 손을 비누로 잘 씻는 경우를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다.

치료제도 백신도 없는 지금으로선 사람들끼리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한다. 처음엔 ‘사회적 거리 두기’라고 하다가, 요즘엔 ‘물리적 거리 두기’로 용어를 바꿔 쓰는 모양이다. ‘물리적’이라고 하는 쪽이 훨씬 적확한 표현이긴 하다. ‘사회적’으로 거리를 두라니까 왠지 사람들과 심적으로도 멀어져야 할 것 같은데,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라고 하면 느낌이 확 달라진다. 한국에서는 3월 30일 0시 기준 9661명이 확진됐고, 158명이 숨졌다. 이 사태를 겪고서야 비로소 ‘아파도 출근하는’ 세상에서 ‘아프면 쉬는’ 세상으로 조금 다가섰다. 일부 업종에서 재택근무 실험이 대규모로 이뤄졌고, 으레 벌어지던 회식은 자취를 감췄다. 원래 혼자 있는 것을 즐기고 타인과의 거리를 넓게 설정하던 나 같은 사람들이 갑자기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거듭났다. 물론 이 짓을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설마 정말로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속절없이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그런 건 아무도 모른다.

2020.03.29. 서울 불광천.

서울에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사실 벚꽃이 피도록 저 바이러스와 싸워야 할 거라곤 처음엔 생각하지 못했었다. 벚꽃이 피고도 학교에 못 가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도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겠지. 전국 곳곳의 벚꽃 축제는 취소됐다. 벚꽃놀이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서울 여의도 윤중로는 4월 1일부터 출입이 통제된다고 한다. 불광천에서 매년 열리던 벚꽃축제도 올해는 열리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사람이 언제까지나 집(또는 ‘집’이 되지 못하는 ‘방’) 안에만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론들은 ‘명소 방문’ 대신 ‘집 근처 산책’을 추천하고 있다. 지난 주말, 불광천엔 꽤 많은 사람이 산책을 나왔다. 마스크를 쓰고서. 사실 평소와 비교했을 때 그다지 사람이 늘어난 것 같지도 않았다. 각기 거리는 한 이삼미터.

2020.03.28. 서울 불광천변의 벚꽃.

‘적당한’ 거리는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신뢰가 있을 때라야 비로소 산출될 수 있다. 상대방이 손을 씻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만지고 지나간 모든 것에서 떨어져야 안전할 것이고, 그렇다면 필요한 거리는 무한정 길어지게 된다. 호흡기 질환이 없는 사람은 야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무리가 없다고 하지만, 기침 예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조금 불편해도 마스크를 써야만 한다. 너는 내가 믿을 수 있을까? 나는 네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일까?

2020.03.28. 서울 불광천.

처음부터, 날 때부터 ‘적당’을 아는 사람은 없다. 소금의 ‘적당량’은 요리와 맛보기를 반복하면서 체득되는 것일 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비단 감염병에 대한 의학적 관점에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해묵은 주제가 오랜만에 다시 발굴됐다고 보는 편이 ‘적당’하겠다. 그러니까, 요는 이것이다. 너는 내가 믿을 수 있을까? 나는 네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일까?

2020.03.29. 벚꽃과 직박구리.

일단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겠지. 그러니 손을 잘 씻자. 사람이 많을 것 같은 곳에 갈 땐 마스크를 쓰고.

@Bokthe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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