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내려다보며 내려다보임을 준비하다 @고양 행주산성

2021.09.04. 도심을 낮게 날아가는 쇠백로.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었나? 대개 이런 말을 “그러니까 노력하자!”라는 문장을 뒤에 숨긴 채 하던데, 사실 이 ‘높이 난다’는 것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타고나는 것에 가깝다. 수천km씩 이동해야 하는 철새와 그렇게까지 이동할 필요는 없는 텃새의 비행능력이 같을 수 없고, 기류만 타고서도 높이 또 멀리 날 수 있는 큰 새와 날갯짓을 쉴 수 없는 작은 새의 비행능력이 동일 선상에서 비교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야는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전쟁하는 군대가 고지를 놓고 싸우고, 산등성이에 성벽을 쌓아서 그곳에서 농성하고, 정찰기를 띄우고, 인공위성의 시야를 빌리는 것이 그래서일 것이다. 구사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이 달라지니까. 삶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라고 한다면, 각자가 서 있는 위치는 차지한 고지에 해당할 것이다. 이 자리가 세계관을 형성하고 취향을 만들며 통찰의 근간이 되니, 분명 그냥 ‘그게 뭐?’ 하고 넘길 수 있는 영역이 아니겠지.

2021.09.12. 경기 고양 행주산성.

행주산성은 경기 고양시 덕양구의 남쪽, 한강 북안에 솟은 작은 산 위에 자리 잡았다. 그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해발 120m 언저리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한강 하류 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중요한 고지라서일 것이다. 경치 맛집은 전략적 맛집이기도 할 테니까.

이름에 ‘산성’이 붙어 있어서 좀 멀게 느껴지지만, 사실 서울에서 찾아가기 매우 쉬운 곳이다. 합정이나 당산에서 버스 타고 곧장 들어갈 수 있다. 버스는 강변북로-자유로를 따라 한강 변을 직진 또 직진하는데, 다만 정류장에 내린 다음 걸어서 들어가는 곳을 찾기가 약간 어려운 게 문제다. 일단 인도 사정이 좋지 않고, 이정표는 주변 음식점의 요란한 간판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세간에 잘 알려진 ‘행주산성’의 이미지 그대로, 산성의 온갖 곳에 권율 장군과 행주대첩 관련 건축물, 조형물이 들어차 있다. 일단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입구에 장군 동산이 서 있고, 잠깐 걷다 보면 1970년대에 세워졌다는 사당 ‘충장사’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턱끝까지 올라오는 숨을 끌어안고 정상에 오르면 행주대첩을 기리는 대첩비를 또 볼 수 있다. 고작 이 정도로 ‘투머치’라 할 만큼 나약한 마음으로 이곳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행주산성의 모든 것이 한 사람과 한 전투를 가리킨다는 점에 조금 경계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021.09.12. 행주산성 정상에서.

올라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토성을 밟아가며 올라가는 북쪽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한강을 바라보며 올라가는, 좀 더 편하고 넓은 길이다. 올라갈 때는 후자를 택했다. 그냥 한강 내려다 보는 경치 때문인 것 맞다. 처음에는 나무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한강은,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동-남-서쪽의 모든 장애물이 사라지며 훤히 보이게 된다. 여기서 한 모퉁이 돌아 조금만 더 밟아 올라가면 덕양산 정상이다.

9월 12일, 이날 하늘은 그야말로 ‘가을하늘 공활한데’의 그 파랗고 맑은 하늘이었다. 햇빛을 잘게 쪼개며 하얀 윤슬로 반짝이는 한강 수면부터, 방화대교의 붉은 아치, 그 너머의 도시, 공항철도 열차가 지나가는 마곡대교, 멀리 병풍이 돼 있는 관악산, 여의도의 새 상징이 된 파크원타워, 주말이라 그런지 꽉 막힌 자유로, 남산타워와 저 멀리 송파구의 롯데월드타워가 한 프레임에 잡히는 진풍경, 그리고 파란 하늘 아래 흰 바위 어깨를 접종룩으로 내놓은 북한산을 거쳐 고양시 시가지까지, 몇 걸음 걷지 않고도 한 바퀴 쭉 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

2021.09.12. 행주산성 정상에서 서울 여의도 방향을 바라봤다. 공항철도 열차가 마곡대교(맨 아래 다리)를 지나고 있다.
2021.09.12. 서울 남산과 롯데월드타워가 이렇게 가깝게 보인다.
2021.09.12. 북한산인 듯하다.

확실히 높은 곳에 오르면 평지에서 아등바등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상쾌함을 느낀다. 그건, 더 넓게 본다는 데서 오는 걸까, 아니면 눈 앞을 가리던 것들이 사라져버려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내 ‘삶’의 공간을 발밑에 두고 관조할 수 있어서일까? 마치, 다들 그대로 아등바등하는 세상에서, 나 혼자 쏙 빠져나온 것처럼. 인생은 전쟁과도 같은 것이고, 그래서 군사적 요충지에서 굳센 마음이 나오나 보다. 가장 평화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전쟁요새에 서서 그런 잔잔한 평화를 느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2021.09.12. 막히는 자유로.

내려올 땐 북쪽 토성길을 이용했다. 비교적 경사가 가파른 편이고, 나무가 상당히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벌레와 뱀을 조심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11월에 찾아가면 안전할 것 같다. 왜냐하면 11월은 노뱀벌(November)이니까. 죄송합니다. 아무튼, 새 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안 들렸던 것 같다. 나비는 이렇게 많은데. 두리번거리며 내려오다 박새 한 무리를 만났다. 아주 부산스럽게 가지와 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다가 땅에 내려와 뭘 주워 먹고는 다시 날아간다. 사진을 찍기가 참 힘들다. 이럴 때면 내가 좀 더 민첩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민첩한 하루 되세요.

다시 월요일이 오면, 정상에서 풍경의 일부로 내려다본 저 ‘삶’에 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게 내 원래 ‘일상’이다. 그렇구나. 고지에서 바라보는 도시 모습의 꽃말은 ‘주제 파악’이었구나. 이제 역할 교대다. 내가 누군가의 풍경이 될 차례다.

@bokthe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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