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비 오는 날이면 간이역에 가야 한다 @서울 경춘선 숲길&화랑대역

2021.10.10. 서울 경춘선 숲길.

어떤 노랫말은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자주 들르던 동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매장 내 배경음악으로 늘 동요가 흘러나왔다. 그중에서 ‘숫자송’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일! 일 초라도 안 보이면

이! 이렇게 초조한데

(중략)

오! 오늘은 말할 거야

육십억 지구에서 널 만난 건…

(이하 생략)

전 세계 인구가 60억 명을 돌파한 것이 1999년의 일이고, 이 노래가 나온 것은 2003년이라고 한다. 이 무렵엔 관용적으로 ‘육십억 인구’라고 말하곤 했던 게 기억난다. 무슨 ‘천만 서울시민’, ‘칠천만 동포에게 고함’과 같은 용법이라고 보면 되겠다. 2021년 현재 세계 인구는 79억 명쯤 됐으니까, 그 사이에 약 20억 명이 늘어난 것이다.

2021.10.10. 서울 경춘선 숲길.

경춘선 철도 하면 김현철의 노래 ‘춘천 가는 기차’를 떠올릴 사람이 많을 터다. 이 노래 또한 2010년에 ‘사료’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복선전철화가 끝나면서 더는 무궁화호 ‘기차’가 다니지 않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차’라는 단어의 쓰임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얘기. 열차가 역에 멈춰 선 채로 마주 오는 열차를 비켜주던 광경도, 대피선 한 줄 없이 피암터널 아래 위태롭게 누워있던 강촌역의 풍경도 모두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곧게 새로 깔린 철길 위로는 새마을호보다 높은 요금을 받는 2층열차 ‘ITX-청춘’과 수도권의 무한팽창을 상징하는 경춘선 광역전철 전동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리 ‘낭만’으로 포장하고 미화해도 그건 이 철길을 나들이 갈 때나 이용하던 이들의 입장에서 그런 것이지, 이것을 매일 출퇴근하고 통학하는 교통수단으로 쓰던 이들에겐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했을 터. 그렇게,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으로 불리던 화랑대역도, 그 앞뒤의 단선비전철 철길도 수명을 다했다. 그런 것이 세월의 흐름이겠거니. 그러고 나서 그 자리에 생긴 것이 ‘경춘선 숲길’이다.

2021.10.10. 서울 경춘선 숲길.

가을비가 내리던 10월 10일, 경춘선 숲길 6km 구간 가운데 옛 화랑대역 주변을 찾았다. 서울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 출구에서 계단 몇 개 올라가면 곧바로 숲길로 진입할 수 있는데, 이날은 지도를 잘못 보는 바람에 봉화산역까지 갔다가 버스로 돌아가야 했다.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찾아가려다 생긴 일이다.

지하철 화랑대역과 옛 경춘선 화랑대역은 약 1km 떨어져 있다. 시나브로 걷기 좋은 정도의 거리다. 숲길에는 레일이 그대로 깔려 있다. 일부 구간엔 침목도(비록 그 상태가 매우 안 좋기는 하지만) 남아있는데, 이걸 보면 아무래도 경의선 숲길과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의선 쪽은 공간을 통째로 재구성한 것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는데, 위치가 위치인 만큼 많이 붐비기도 해서 도회지 느낌이 물씬 난다. 공원화 구간인 용산선 자체가 너무 오래전에 운행 중단된 노선이었던 탓도 클 것이다. 반면 경춘선은 ‘사람 손을 덜 탄 녹지’ 같다. 원래 모습을 살리고 주변을 과하게 치장하지도 않은, 그런 수수한 맛이 있다.

2021.10.10. 서울 경춘선 숲길. 바로 오른쪽 버스가 정차해 있는 곳이 서울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 출구다.

분위기가 이러하니 자연히 야생동물들과의 만남도 기대하게 되는데, 이날은 비가 내려서 그런지 아쉽게도 박새 한 마리 마주치지 못했다. 대신 휴일에도 열심히 일하는 웹 디자이너(web designer, 거미)를 다수 만날 수 있었다. 가는 빗물이 거미줄(web)에 떨어져 방울방울 맺힌 것이 아름다웠지만, 아무래도 거주자로서는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웹 사이트(web site)의 유지보수 작업을 서두르고 있었다. 버그(bug, 벌레)도 잘 잡아냈길.

옛 화랑대역은 육군사관학교 입구에 딱 붙어 있다. ‘화랑대’라는 이름 자체가 육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이라고 불린 역으로, 비대칭형 박공지붕을 머리에 얹은 조그만 건물을 역사로 썼다. 오래된 간이역사 특유의 옥색 페인트칠이 친숙하다. 엄밀히 따지자면 서울에도 ‘간이역’ 등급의 역은 여전히 여럿 있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간이역’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쪽은 이곳이 마지막이 맞을 것이다.

육사삼거리 횡단보도에서부터 ‘혀기’ 증기기관차와 협궤열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762mm 협궤철도였던 수인선이나 수려선에 투입된 열차로, 경춘선과 어떤 관계가 있는 열차는 아니다. 객차에 타볼 수 있게 돼 있는데, 협궤열차가 얼마나 작은지 몸소 체험할 수 있다. 자리마다 220v 콘센트가 설치돼 있어 비를 피하거나 잠시 쉬었다 가기에 아주 좋다.

2021.10.10. 서울 화랑대 철도공원에 전시된 협궤열차.
2021.10.10. 서울 화랑대 철도공원. 왼쪽이 협궤열차고 가운데 Y자로 갈라지는 철길이 표준궤인 옛 경춘선 철길이다.

여러 조형물이 설치된 터를 지나 승강장 쪽으로 눈을 돌리면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이는 무궁화호 열차 한 편성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열차는 통째로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고, 꼬리쪽 한 칸은 기념품 가게다. 승강장은 영락없는 ‘간이역 승강장’이다. 가로등 기둥이며 이정표며 하는 것들이, 나중에 조금 손을 본 것 같기는 하지만, ‘아, 그거다!’ 하는 반응을 불러오기에 충분할 정도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맨 앞에 괴상하게 ‘미카’ 증기기관차가 달려 있어서 아무래도 갓 쓰고 짚신 신은 채로 be the reds 티셔츠에 레깅스를 입은 듯한 부조화를 느끼게 되지만, 그럼에도, 승강장과 무궁화호 열차가, 간이역이면 으레 그랬던 승강장 들어가는 건널목이, 나팔꽃으로 치장된 가로등 기둥이, 박물관 입구에서 들리는 녹음된 열차 소리가, 그 이상하게 높은 재현력이, 묘하게 ‘옛날’ 같지 않은 ‘옛날’을 생각나게 한다.

2021.10.10. 서울 화랑대 철도공원.
2021.10.10. 서울 화랑대 철도공원.
2021.10.10. 서울 화랑대 철도공원. 참 묘한 감성이다.

역 구내에는 일본과 체코에서 운행되던 노면전차도 전시돼 있다. 전부 해서 ‘화랑대 철도공원’이다. 그리고 이 철도공원의 하이라이트는 ‘기차가 있는 풍경’ 카페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다. 옛 역사 바로 옆에 마련된 카페로, 한시도 시선을 가만히 둘 수 없는 그야말로 ‘별세계’다. 들어가자마자 온갖 열차 모형들이 전시돼 있고, 머리 위로는 천장에 매달린 레일 위로 장난감 열차가 쉴 새 없이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1층 창가로 깔린 ㄱ자 모양 레일을 통해 작은 열차가 음료가 배달된다. 먼저 자리르 잡고서 카운터로 가서 주문하면 지정된 자리까지 열차가 운행하는 시스템이다. 사실 한 번 가서 자리를 못 잡고 나왔다가 밥을 먹고 다시 가서 결국 성공했다.

2021.10.10. 애옹.
2021.10.10. 서빙열차.

이뿐이 아니다. 1층 매장 한가운데에 우주왕복선 모형이 전시돼 있는데, 이게 20분마다 ‘발사’된다. 안개를 연기처럼 내뿜으며 천장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그 쇼를 보기 위해 20분마다 손님들이 그 주변에 모여드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어린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커피와 케이크의 맛도 훌륭하고, 어린이를 위한 메뉴도 준비돼 있다.

2021.10.10. 발사!

어느덧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졌다. 비도 어느새 그쳤다. 다시 지하철 화랑대역까지 걸어갈까 하다가, 그냥 육사삼거리에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갑자기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럴 때마다, 나는 그냥 하루하루 별 생각도 못하고 살아가는데 그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바뀌어 있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바뀐 건 바로 나라는, 그런 생각을 또 한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철도를 통해 출근하고 퇴근하고 등교하고 하교하고 장을 보러 가고 친구를 만나러 가고 당근 거래하러 가고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쌓은 일상이 나중에 역사도 되고 그러는 거겠지. 육십억이 팔십억 되고 기차가 전동차 되듯이.

2021.10.10. 서울 화랑대 철도공원.

문을 연 지 1년여 만에 간판을 내리고 만, 그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이런 노래도 나왔었다. “장난감 기차가 칙칙 떠나간다 / 과자와 사탕을 싣고서…” 기차로 커피 서빙을 받은 날에 문득 생각이 났다.

@bokthe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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