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 완료. 연못 한가득, 올해의 연꽃 향기 @전주 덕진공원
등줄기로 굵은 땀방울이 도로록 굴러 떨어진다. 짙은 구름이 해를 가려서 뜨겁지는 않지만, 이런 날이 더 더울 수도 있다. 직화로 구워지느냐, 수비드로 천천히 익느냐, 그 차이일 뿐이다. 6월 말에 피기 시작하는 연꽃은, 이런 날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볼 수 있다. 그 정도 수고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연이 뭐 사람에게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전주 덕진공원 연못은 전국적으로도 손꼽는 연꽃 명소다. 약 10만㎡ 연못을 딱 반으로 갈라 한쪽을 연꽃 군락이 뒤덮고 있었는데, 최근에 연화교가 철거되면서 이게 더욱 확산됐다. 지금은 연못의 대부분이 연잎 그늘 아래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연화교가 철거되기 전에 전주시설공단에서 “연꽃의 수는 어림잡아 50만~100만 주”라는 답변을 받았었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물론 사람이 일일이 셀 수 없으니 추정만 할 뿐이다. 연못 가장자리에 다가서면, 연꽃 향기가 꽤 진하다.
터가 넓어서 그런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 다른 데서 본 것보다 꽃도 잎도 훨씬 크다는 느낌이 든다. 윤선도가 써둔 것처럼 연잎에 밥을 싸 두려면 한 끼 정도로는 어림도 없겠다. 키도 상당히 커서, 어떤 것은 수면 위로 한참, 사람 눈높이까지 올라오기도 했다. 사실 연화교를 건너면서 보는 것이 가장 좋았는데. 오래된 옛 연화교를 대신해 새로 짓는 구조물을 기대해 볼 수밖에.
덕진연못은 이름난 ‘연꽃 명소’이기도 하지만, 물론 ‘연꽃만’ 있지는 않다. 오리도 있고, 쇠물닭도 있고, 잉어를 비롯한 각종 어류도 있고, 각양각색의 잠자리도 있다. 연화교가 철거되기 전에는 교각의 기초 부분이 오리들의 아지트였다. 겨울에도 연못을 떠나지 않고 얼음판 위를 돌아다니던 모습이 기억난다.
‘원래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지만, 덕진연못은 엄연한 인공 연못이다. 후백제 때 풍수지리설에 근거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일대를 아울러 공원으로 조성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라고 한다. 분명하게 인공의 것이면서도, ‘인공 연못’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것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 든다. 여긴 워낙 자주 봐서, 익숙해서 그런 걸까? 조성된 지가 오래돼서, 세월의 때를 많이 타서 그런 걸까? 어쩐지 서울 석촌호수, 경기 고양 일산 호수공원에 갔을 때 느낀 것과도 좀 다르다.
더운 날씨였지만 사람이 꽤 있었다. 특히 연지교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 간격이 사실상 ‘사회적 거리 두기’의 마지노선까지 좁혀질 정도로 많은 방문객이 몰렸다. 어떤 경우에는 연꽃이 연지교 난간까지 타고 올라오기도 하는데, 이날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물닭과 오리를 실컷 구경했으니 그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었다고 하겠다. 연화교가 없는 상황에서 물 위를 지나는 유일한 포인트이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사실 ‘연지교에서’ 찍는 것보다 ‘연지교를’ 찍는 게 더 예쁠 확률이 높다. 기와 덮은 정자를 가운데 두고 자연스럽게 구불거리는 나무다리가 연꽃과 퍽 잘 어울린다.
이곳에선 노점에서 파는 뻥튀기를 너도나도 들고 다니는데, 볼 때마다 반드시 그중 한두 명은 뻥튀기를 잘게 쪼개 새들에게 모이로 주고 있다. 가장 큰 수혜자는 비둘기다. 도심에서 비둘기가 혐오 받지 않는 몇 안 되는 곳이 여기일 것이다. 매일같이 비둘기에게 모이를 던져주던 ‘비둘기 할아버지’도 계신다. 그분이 나타났다 하면 비둘기들이 다가가서 어깨에도 올라가고 손에도 올라간다.
그렇게 잘 먹어서인지, 여기 비둘기들은 토실토실하면서 때깔도 말끔하니 좋다. 스트레스라면, 아직 호감 표현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알지 못하는 나이의 어린이들이 비둘기를 워낙 좋아해서 종종 도망 다녀야 하는 것 정도가 있을 것이다. 그 주변에는 참새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비둘기가 미처 다 수확(?)하지 못한 부스러기들을 먹는다.
한편 최근에 구입한 올림푸스 E-m1mk2의 성능을 시험해 볼 기회이기도 했다. 최신 기종인 E-m1mk3에서 훨씬 개선됐다고 하나, 이전에 쓰던 것이 E-m1이었기 때문에 반응속도와 AF 영역, 셔터감 등 모든 면에서 확실한 진보가 느껴진다. 가장 와닿는 것은, 찍은 사진을 다시 볼 때 넘기는 속도가 매우 빨라진 것. E-m1은 한 컷 넘기고 잠깐 쉬고 또 한 컷 넘기고 잠깐 쉬고… 하는 식으로 조작해야 했으니 사진을 많이 찍은 경우(특히 연사로 촬영한 경우)에 상당히 피곤했다. 2016년에 나온 기종을 2020년에야 체험하면서 별걸 다 감탄하고 있다.
잠을 못 자 머리가 지끈거리고, 밥을 너무 많이 먹어 속이 부대끼고, 덥고 습한 데다 마스크를 써 숨쉬기가 힘들었던, 그래서 그다지 평화롭지 않았던 나를 제외하면 공원의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평화로운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올해도 연꽃을 실컷 봤으니 됐다. 2020년의 나머지 절반도 그냥 뭐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 보면 지나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무난함’은 바랄 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책임과 자격의 문제다.
@Bokthe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