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중순, 새해는 이제 시작이다 @서울 응봉산
신년호, 그러니까 1월 1일 자 신문에 빠짐없이 들어가는 게 새해 지지에 해당하는 동물과 그 동물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올해는 신축년이고 ‘축’에 해당하는 동물은 소니까 자연 소에 관한 기사가 비중있게 다뤄졌다. 소라는 동물이 어떤 동물인가 설명하는 기사부터 해서 특별한 소 이야기, 소와 관련된 지명, 소띠 운세, 소띠 사람들의 새해 각오, 뭐 이런 것들.
천간지지는 음력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실제 신축년이 온 것은 음력 1월 1일, 양력으로 2월 12일이었다. 그러니 신년호 기획기사들은 엄밀히는 지나치게 이른 기사다. 소 관련 기획기사들은 신년호 특집이 아니라 설 특집으로 들어갔어야 적확한 것이 된다. 물론 이것은 딱히 중요하지 않다. 한 해의 정의와 해가 바뀌는 기점은 어떤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한 약속에 따른 것이고, 그 약속도 시대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니까.
경자년 마지막 날, 그러니까 ‘까치설날‘에 응봉산에 올랐다. 봄이면 개나리가 만개해 온갖 카메라의 렌즈가 향하는 곳. 카카오TV에서 방영한 <밤을 걷는 밤>이라는 예능프로그램에 소개된 것이 생각나 대충 찾아갔다. 높이(해발 약 81m)로 따지면 ‘산’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곳이지만, 오르는 길의 경사가 가파른 편이라 그냥 ‘산책’하는 마음으로 찾아가면 당황하게 된다. 물론 우리도 그랬다.
왼쪽으로는 쭉 중랑천과 함께 절벽 아래 경의중앙선 철길 모습이 보인다. 그 반대편엔 나무와 덤불이 번갈아 나타난다. 그 속에서 박새나 붉은머리오목눈이 같은 작은 새들이 쉴 새 없이 떠든다. 다만 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덤불 어딘가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오겠지’ 하며 기다릴 만큼의 인내심은 없으니 그냥 전진한다.
팔각정까지 오르면 한강을 중심으로 서울의 남쪽과 동쪽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아니다. 사실 한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경치가 워낙 탁 트여서 고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80도는 돌려야 겨우 그 모습을 다 담을 수 있다. 이날 미세먼지 농도가 짙어 멀리까지 선명하게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미세먼지가 만들어낸 그 안개 비슷한 것을 뚫고 동쪽으론 롯데월드타워와 잠실 주경기장이 보였다. 원래 롯데월드타워에서 불꽃축제를 하면 이곳 응봉산이 관람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는 사실이 문득 떠오른다. 서쪽으론 멀리 여의도와 남산이, 그 앞으로 아파트들이 이룬 숲이, 그 앞엔 아직 건설 중인 까치둥지가 보였다. 그리고 팔각정 옆 숲에선 온갖 새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원경부터 근경까지 버릴 것 하나 없다.
어렸을 땐 해가 바뀔 때마다 ‘새해 다짐’ 비슷한 것을 했던 기억이 난다. 순전한 내 의지는 아니고, 방학 숙제로 일기를 쓸 때(교사가 일기장을 검사하는 건 엄연한 인권침해로, 이미 2005년에 국가인권위가 이 같은 판단을 내놨다) 별 생각 없이 그런 것을 적었던 것 같다. 한참 지난 일이라 기억은 안 나지만, 어쩌면 글감을 아껴놓으려고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땐 일기장 한 페이지씩 채워나가려고 ‘일기’도 아닌 것을 써재끼곤 했으니까 그럴 만하다.
그땐 해는 맨날 뜨고 지는데 뭐 특별할 게 있냐던 어른들의 말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때 그 어른들 나이에 근접한 지금 보면 맞는 말이다. 그냥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계절이 반복되는 주기를 계산해 해를 나누고, 그렇게 정해진 임의의 숫자가 바뀌는 것이다. 왜 굳이 한겨울에 해가 바뀌는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기준은 사람들이 만들어가기 나름이니까. 그렇게 생각은 한다.
머리에 든 생각이야 그렇다 해도 굳이굳이 양력 음력 1월 1일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2021년’과 ‘신축년’은 더욱더 그렇다. 그냥, 지긋지긋한 나날이었으니까. ‘비정상’이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시절이었으니까. 뭐 하나 잘된 것도 이룬 것도 없이 실망과 좌절만 거듭했던 그런 해였으니까.
내려오면서 지는 해와 까치둥지가 겹쳐지는 것을 봤다. 섣달그믐, ‘까치설날’을 끝으로 묵은해를 완전히 떠내려 보낼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하산했다. 한국인의 ‘새해’는 설날 연휴까지라고 누가 그랬는데. 그러니까 한 달 넘는 시간이 대충 지나갔어도 이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면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 그렇다고 없던 새해 계획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뭐가 갑자기 확 바뀌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고, 그냥, 뭐라도 되긴 됐으면… 하는, 그런 느낌.
그리고 다음 날 닭 육수로 떡국을 끓였다. 나이는 그만 먹고 싶지만.
@Bokthe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