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하는 소리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3월, 겨울의 어제, 봄의 내일, 그리고 제자리 찾기

단풍이 다 떨어질 때도, 찬바람이 불어 ‘아, 내일은 꼭 롱패딩을 입어야겠다’ 생각할 때도, 달력 날짜가 12월로 넘어갈 때도 사실 ‘겨울이 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늦가을? 늦늦가을? 후기 가을? 뭐지? 그런 느낌. 아니, 그렇다고 ‘겨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고, 그냥 날이 지나가는 것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얘기다.

2021.12.07. 서울 불광천에서 어린 해오라기 한 마리가 미꾸라지로 추정되는 뭔가를 잡아먹고 있다. 12월이지만 딱히 겨울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세월 감각이 뭔가 문제를 일으킨 걸까? 이를테면 한 십여 년 전만 해도 크리스마스! 하면 뭔가 형용하기 어려운 들뜬 마음이 가슴속으로 확 치고 들어오곤 했다. 그 ‘기분’이 아니라 ‘그런 기억이 있다는 사실’이 기억난다. 그냥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하루’가 쭉 반복되고, 그냥 추우니까 보일러 때고, 날짜 쓸 때 버릇처럼 2021 쓰다가 뒤늦게 1에 2를 덧씌우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니까 롱패딩 입고, 한 0도쯤 되면 코트 한 번 입고, 후회하고, 그러다 눈이 오면… 그래, 눈이 오던 때만큼은 ‘겨울이구나’ 하는 생각이 확 들었다. 눈만 오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그… 일단 내가 운전자가 아니니까!

2021.12.18. 눈 내리는 서울 불광천에서 오리 한 쌍이 궁둥이를 하늘로 향한 채 수면 아래 먹이를 찾고 있다.

지난 2월 초, 설 연휴 지나고 그 주말에 본가에 다녀왔다. 본가에 가면 늘 늘어지게 잠만 자다 오기 일쑤인데, 그날은 어쩐 일로 몸을 일으켜 집 근처 삼천변에 가볼 의지를 짜냈다. 추운 날씨는 아닌데 뭔가 한기가 드는 느낌, 뭔가 공기가 축축하니 가라앉는다는 느낌이었다. 삼천엔, 불광천에서도 볼 수 있던 쇠오리 무리가 수면 위에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백로는 성큼성큼 걷고 논병아리는 배를 수면에 댄 채 발을 굴러 질주했다. 족히 열댓 마리는 될 왜가리 무리가 마치 판초우의를 뒤집어쓴 군인들처럼 나란히 서있었고, 그리고, 정말 뜬금없게도 갈매기 한 마리가 쉬고 있었다.

2022.02.05. 전주 삼천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이륙하고 있다.
2022.02.05. 수면을 질주하는 논병아리.
2022.02.05. 왜가리 무리. 백로 한 마리가 잠입해 있다.

억새의 장벽 너머에서 쉬고 있던 갈매기가 곧 날아가 버렸다. 징검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그만 싸라기눈 같은 게 떨어지더니 곧 ‘가루’가 ‘송이’가 되면서 펑펑 쏟아졌다. 앞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KF94 마스크에 가로막힌 입김이 안경으로 올라오고는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눈이 워낙 많이 쏟아지면서 공기 전체가 뿌옇게 변한 것이었다. 곧 시야 전체가 무채색으로 덮였다. 마치 수묵화 속에 온 것 같은 기분. 그 가운데서 백할미새 두 마리가 바삐 이리저리 날았다. 한참 서있던 백로도 더 좋은 자리를 본 것인지 잠깐 떴다 내렸다.

2022.02.05. 눈을 맞으며 걷는 백할미새.
2022.02.05. 눈이 펑펑 쏟아지는 가운데 백로 한 마리가 날고 있다.
2022.02.05. 백로와 쇠오리.
2022.02.05. 백할미새 두 마리. 무슨 관계일까?

그러나 나는 도사도 전우치도 강동원도 아니고, 그림 속에 언제까지고 머물 수는 없었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도시의 임금노동자. 허허, 노동자 놈이라? 노동자는 무엇이냐. 가치를 생산하고, 경제를 돌리며… 몸과 마음이 피곤하다. 그것이 노동자다.

하루하루 겨우 살아내는 가운데 갑자기 담당 업무가 바뀌었고, 그 여파로 2월 내내 정신이 없었다. 뭐 정신이 언제는 있었냐마는. 아무튼 집-회사-집의 반복. 그게 겨울의 나머지 전부였다. 가끔 카메라 들고 근린공원이나 다녀오는 게 낙이었다. 공원에서 새 친구를 많이 만나서 다행이었던 날들.

2022.02.12. 까치 한 마리가 나뭇가지를 물고 둥지를 살피고 있다.

3월이 되자마자 첫날부터 아주 포근해졌다. 지난해 4월 이후로 봉인해 둔 트렌치코트를 오랜만에 걸쳤다. 이렇게 입어도 별로 춥지 않은 것을 보니 확실히 봄이 오기는 오는 모양이다. 그러면 겨울 손님은 떠나야지. 불광천에는 이제 쇠오리가 없다. 오늘은 마주친 백할미새도 다음에는 못 볼 터다. 다들 제자리를 찾아 떠난다. 만 2년이 넘도록 밀려나 있는 일상도 머지않아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2년 전에 품었던 소망을 다시 꺼내본다. 우크라이나의, 미얀마의, 팔레스타인의 도둑맞은 평화도 조만간 돌아오기를 바라며.

2022.03.01. 목련의 꽃눈.

@Bokthe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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