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 시 아무튼 내 말이 맞음의 시대에 반박 참고 먹을 거나 챙기기
전 세계적으로 거대한 인플레이션 폭풍을 맞이하는 시절이라 그런지, 표현에도 인플레이션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듯하다. ‘외교참사’라는 말로는 최근 일주일 동안 일어난 사건을 전부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해서 그보다 더 강한 단어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파탄’이라든지 ‘붕괴’라든지 하는 단어로도 느낌이 부족한 것 같다.
이 사태의 백미는 윤석열 대통령의 “이 새끼들”과 “바이든이는 쪽팔려서 어떡하나” 발언을 비판하는 여론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적반하장이다. 그냥 아, 제가 경솔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했으면 좀 웅성웅성하고 말았을 일을 사실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했다!! “이 새끼들”은 한국 야당 국회의원들을 말한 것이다!! 하고 우기다가 급기야는 아무튼 언론 보도가 잘못됐다!!라든가 조치를 취하겠다!!까지 나아간 것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얼마 전에 화제가 된 ‘심심한 사과’ 사건도 그렇고, 여성가족부 해체가 목표라는 여성가족부 장관의 “여성혐오 아님” 발언들도 그렇고, ‘내/우리의 오류를 인정하면 진다’는 생각이 시대정신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반박 시 아무튼 내 말이 맞음. 이런 ‘대안현실’의 세계에서 제정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모르겠다.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농작물은 거짓말을 못 한다. ‘아무튼 내가 맞다’고 우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농사 농사 하는 모양이다. 물론 거짓말과 ‘대안현실’은 없어도 체리피킹은 존재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내가 키운 것도 아닌 고구마를 본가에서 그냥 가져다 먹는 것. 내가 짓는 것도 아닌 농사를 가지고 글감 하는 것. 그런 주제에 밭에 일하러(사실은 놀러) 가서 괜히 뿌듯해하는 것. 도시민이 품는 일방적인 낭만 그 자체.
주말에 본가에 다녀왔다. 어느 틈에 우리 집의 가장 큰 관심사는 ‘농사’가 차지했다. 엄마아빠와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잔뜩 밭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뭘 수확했고 뭘 심었고… 그런 이야기와 주키니호박 한 개에 5000원을 넘나들 정도로 밥상물가가 뛰었는데 우리는 먹을 것 걱정은 없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잔뜩 들었는데, 나는 역시 이렇게 불확실성이 큰 시기에는 식량안보가 최우선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써놓고 보니 제정신으로 한 말은 아닌 것 같군.
일단 밭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몸에 먼지 하나 안 묻히고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호미 여분이 없다고 해서 가만히 구경만 할 수도 없는 법. 힘도 요령도 없으면 잔심부름이라도 해야 한다. 땅속에서 나온 고구마, 땅 위에서 따낸 고구마 순을 바구니에 담아 옮긴다. 농부들의 작업에 필요한 연장을 가져다준다. 어느 연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서 한참을 헤매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을… 수도…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그건 모르겠다. 몰라몰라 이런 덜떨어진 나를 밭에 데려온 건 엄마입니다.
늘 가락시장을 거쳐 시장에 유통되는, 딱딱 크기 모양 색깔 맞춰서 나오는 규격 내 농산물만 보다가 제멋대로 생긴 날것 그대로의 고구마를 보니까 신기하고 새롭다.
빨간 등이 반짝반짝 빛나는 무당벌레 한 마리가 내 손가락에 탔다.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마치 뽀득뽀득 잘 닦은 공산품처럼 생겼다. 벌레는 그 조그만 다리로 손가락을 등반해 손등을 넘어 올라온다. 땅으로 내려보내고 싶은데 이 아이가 스스로 내려가는 않을 듯하고, 그렇다고 손가락으로 튕겨버리거나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숨을 훅 불었다. 잠깐 날아가다 연착륙해서는 밭고랑을 따라 걸어(?)간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순간의 반짝임과 낭만을 즐기기엔 나는 너무 도시화된 모양이다. 체리피킹조차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이다. 온몸이 가렵다. 벌레 녀석들, 아주 멋진 식사를 했나 본데. 다시 서울로 오니 또 뉴스와의 전쟁이다.
@Bokthe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