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아쉬우면서도, 이해는 되면서도. @옛 서도역

2020.01.25. 남원 옛 서도역에서 오수 방향을 바라본 풍경. 맨 오른쪽 건물은 화장실이 있는 건물(원래는 창고를 비롯한 몇 가지 시설이 함께 있었다)이고, 그 뒤로 우물과 역장 관사가 놓여 있다.

열차를 타면, 마냥 즐거웠다. 명절을 맞아 아버지 본가로, 또 집으로 향하는 열차였다. 덜컹덜컹 하는 특유의 규칙적인 소음도 좋았고, 호-도과자가 있어요 호-도과자- 천-안의 명물 호-도과자, 오-징어 맥주- 있어요-, 김-밥이 왔어요 김밥- 하는 열차 내 이동판매원 목소리 듣는 재미도 좋았다. 창밖 풍경이 일정한 속도로 지나가는 것도, 멈추는 역마다 형태가 다른 것도 흥미로웠다. 차만 타면 멀미를 했던 내겐, 멀미 걱정을 좀 덜 해도 괜찮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에야 내게 명절은 ‘노는 기간’이었으니 더 그랬을 것 같기도 하다.

용케도 ‘대국민 티케팅’에 성공했다. 처음엔 5000번대의 대기 번호를 보고 탄식했지만, 그 숫자는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들어 상하행 무궁화호 좌석 정도는 어렵지 않게 예매할 수 있었다. 게다가 며칠 뒤에는, 혹시 몰라 대기를 걸어놨던 상행 KTX 표도 잡게 됐다. 하필 그 표가 특실 표라서 국밥 대여섯 그릇 상당의 돈을 내야 했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특실 한 번 타보겠어’ 하는 마음이 나를 그대로 결제로 이끌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KTX 특실 좌석은 과연 편안했다. 진행방향 오른쪽, 혼자 앉는 자리에 배정돼서 더욱 안락했다. 승무원이 돌아다니면서 견과류를 담은 작은 꾸러미를 건네기도 했다. 야, 이래서 특실을 타는 거구나, 돈만 있으면 특실 타겠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실 안락하다고 해봐야 딱히 즐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전주에서 용산까지 한 시간 사십 분, 트위터 타임라인 좀 보다 보면 위치가 도(道) 단위로 휙휙 바뀌는 고속열차 아닌가. 이런 게 있으니, 이전 직장에선 당일치기 출장도 종종 다녔다. 당일치기가 뭐야. 서울로 출근했다가 오전엔 전주에서 일하고 오후엔 서울로 돌아와서 남은 일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편한 열차를 타고 오면서, 뭔가 허전하다는 기분이 든 이유는 뭐였을까. 열차 내 이동판매원이 없어져서였을까, 훨씬 빠르고 조용해져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세월이 많이 지나서 그런 것이었을까. 라떼 운운하는 말을 꺼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교통수단은 당연히 빠르고 편할수록 좋다. ‘재미’와 ‘편리’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자면, 일상의 생활인으로서 ‘편리’가 우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바글바글한 서울 2호선 순환열차에도 당산철교가 있듯, 가끔은 열차 내 이동판매원 목소리가 그립다.

2020.01.25. 남원 옛 서도역.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의 배경이기도 하고, 최근엔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의 촬영지로도 알려진 남원 옛 서도역은 들를 때마다 뭔가 조금씩 변해 있다. 몇 년 전엔 선로가 조랭이떡 모양의 순환선으로 바뀌어 있더니(레일바이크 운행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엔 ‘경성’이라 쓰인, 정체 모를 행선판이 세워져 있었다. 한글 ‘경성’과 한자 ‘京城’ 아래엔 로마자 ‘GYEONG SUNG’이 쓰여 있었는데, ‘경성’이 적힐 시절을 고증한 것이면 ‘KEI JO’나 ‘KYONG SONG’이라고 쓰는 게 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표기가 맞고 틀리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긴 경성역이 아니라 서도역인데.

이전한 게 언젠데 그래도 옛 역사가 이만큼 보존되고 있는 게 어디냐 싶다가도, 선로를 잃어버리고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상행 플랫폼을, 쇠사슬로 꽁꽁 묶인 채 낡아가는 레일바이크 차량을 보면 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동판매원 대신 자판기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다. 문득 경의선 숲길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래, 그래도 옛 역사와 시설물이 이만큼이나마, 이런 모습으로나마 보존되고 있는 게 어디냐. 건물들이 말끔하게 정비된 것이나 주변 공원이 잘 꾸며진 것 정도로 위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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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kthe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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