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마감이 있다면. @경희궁
지금도 물론 게으르기 짝이 없지만, 어릴 적엔, 그러니까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정말로 게으름의 극치를 달렸었다. 숙제가 있다? 일단 안 하고 버틴다. 그러다 마감일이 돌아오고, 막판에 몰아서 하다가 결국 다 못하고, 회초리를 몇 대 맞는다(참고: 체벌은 폭력입니다). 영어 학습지를 할 때도 그런 식이었다. 선생님 오시기 두어 시간 전부터 교재에 급하게 아무말이나 적어 넣다가 혼난 적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과제를 할부로 하는 사람’이 되면서 벼락치기와는 조금 거리를 두게 됐지만, 이번엔 불안과 함께 살아가야 할 처지가 됐다. 만약 18일에 제출해야 한다면, 난 8일부터 불안하기 시작할 거야. 성미가 급한데 집중력은 없고, 불안하니까 뭔가 하기는 해야 되겠는데 단숨에 끝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금방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고, 그래서 잠깐 하다 말고, 이런 걸 열흘 동안 반복하는 식이다. 나는 계획이 다 없다.
서울에, 정말 모처럼 눈 다운 눈이 내렸다. 16일엔 ‘이러다 말겠구나’ 싶을 정도로만 왔지만, 17일엔 ‘그동안 못 오던 것 꾹꾹 눌러 담아서 한꺼번에 내리는구나’ 싶을 정도로 쏟아졌다. 날씨에 무슨 계획이 있겠냐마는, 벼락치기라면 또 정말 강렬한 인상의 벼락치기다. 그러고보니 애초 ‘벼락’이 기상현상이구나. 역시 날씨는 하늘의 영역이다.
17일, 카메라를 들고 서울 경희궁을 찾았다. 평소 볕 좋은 날 낮엔 한 손에 종이컵을 든 인근 직장인들로 가득한데, 이날은 서너 명이 전부였다. 유물 발굴조사 때문에 숭정전 앞이 파헤쳐져 있었고, 흙더미 위로 눈이 쌓여 있었다. 바람 부는 소리를 빼면, 소리라곤 눈 떨어지는 소리가 전부였다. 아주 작은, 지글지글, 뭐가 끓는 듯한, 또는 레코드판 돌아가는 듯한 소리.
눈발이 흩날리는 광경을 제대로 포착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일단 눈송이가 웬만큼 커야 한다. 그래야 적당히 눈이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또 높은 밀도로 쏟아져야 한다. 그래야 ‘어쩌다 잡힌 먼지’ 같은 느낌이 아니라 눈이 막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떨어지는 속도가 적당히 느릿느릿하면 좋다. 셔터속도 설정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 눈송이가 충분히 큰 함박눈은 적당히 느릿느릿 떨어진다.
그런데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춰도, 어두운 배경이 없으면 또 사진으로 담아내기가 어렵다. 내 경험상,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이 눈 사진에 아주 좋은 배경이 되어 준다. 그 자체로도 매우 운치가 있지만,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가 두드러지면서 떨어지는 눈송이가 잘 보인다는 점이 좋다. 아니면 아주 울창한 숲도 좋다. 특히 녹색이 살아있는 침엽수림, 이를테면 부안 내소사 전나무숲 같은 곳이 눈 내리는 풍경 촬영에 좋다.
장비는 방진방적 성능을 갖춘 것이 좋은데, 그야 당연하게도, 내리는 눈도 녹으면 물이 되기 때문이다. 펜탁스나 올림푸스의 하이엔드급 장비들이 그런 맥락에서 유용하다. ‘방진방적’이 ‘방수’와 동의어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날씨에선 확실히 마음이 든든하다. ‘사람이 걱정되지 장비는 걱정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니까. 카메라 본체와 렌즈뿐 아니라 방진방적을 지원하는 플래시까지 달면 금상첨화다. 눈송이는 빛을 아주 잘 반사하기 때문에, 플래시를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만 약하게 쳐 주면 가까운 눈송이들이 하얗게 빛나면서 더 몽환적인 느낌이 된다.
17일, 패딩점퍼 주머니에 넣어서 갖고 다닐 요량으로 E-m5mk2에 14-42 EZ 렌즈를 물렸다. 14-42 EZ는 방진방적이 되는 렌즈는 아니지만, 워낙 작으니 그냥 손으로 적당히 감싸 쥐고 다니면 이 정도의 날씨에선 별 탈 없다. 주머니에 넣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냥 사진 찍는 데에만 집중하겠다, 하면 선택은 물론 12-40 pro겠다. 몽글몽글하게 녹아드는 배경흐림을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고, 방진방적 성능도 일품이다. 그리고 설경을 찍을 땐 노출보정을 잊지 말자. +1ev 내외에서 적당히. 될 수 있다면 자외선 차단제와 선글라스도 챙기면 좋겠다.
눈은 오후 늦게 그쳤다. 그리고 18일에는 응달 일부에만 흔적을 남긴 채 전부 ‘눈 녹듯’ 사라졌다. 마감 앞두고 부랴부랴 몰아서 하는 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이 눈이야말로 이제 봄이 머지않았다는 신호 비슷한 무언가가 아닐까, 그런 느낌이 든다.
물론 사람의 기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날씨엔 계획이 없다.
@Bokthe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