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여기에 길고양이 사진을 입력]

2020.03.14.

몇 년 전, 아파트 단지에 삼색 고양이가 있었다. 주차된 자동차 아래에서 식빵 굽는 자세를 하고서 앉아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애옹애옹 울곤 했다. 그럼 또 나 같은 사람이 헐레벌떡 고양이 음식을 갖다 바쳤다. 주로 습식 파우치나 캔 같은 것이었고, 간혹 템테이션 같은 간식을 줄 때도 있었다.

이렇게 앉아서 사람들 지나다니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2015년 12월 13일 촬영.

간식은 잘도 먹으면서, 사람과의 거리는 또 칼같이 지켰다. 사회적 거리 두기였을까? 간식을 주면 와서 먹는 게 아니라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앞발을 길게 내밀어 쓱 끌고 가서 먹었다. 조금만 가까이 갈라치면 하악질을 하거나 뒷걸음질을 쳤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건 정말 중요한 생존 전략이었던 것 같다. 혹여 누가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해.

정기적으로 사료와 물을 챙겨주는 주민도 있었다. 그러나 삼색이와의 만남은 그 겨울을 넘기지 못했는데, 아파트 외벽 도색작업 때문이었다. 그 뒤로 단지에서 삼색이를 본 적이 없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아니면 사료와 물을 챙겨주시던 분이 집에 들인 걸까? 행방은 모르겠다. 그 뒤로 한동안 아파트 단지에서 고양이를 보지 못했다. 가끔 지나가는 녀석은 봤지만, 같은 얼굴을 두 번 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아마도 그냥 ‘지나가는’ 것일 뿐이었던 것 같다. 나중엔 내가 다른 지역에 나가 살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론 못 보는 게 당연했겠다.

2020.03.14.

오랜만에 본가에 들렀다. ‘잠시 멈춤’ 캠페인의 영향이었을까, 주말 인기 시간대의 전라선 하행 KTX 열차에 빈자리가 있는 건 처음 봤다. 평소엔 한 주 전쯤에 예매해야 원하는 시간대의 원하는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대중교통이라면 걱정이 될 수밖에 없긴 하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괜히 마스크(면 재질)를 한 번 올려 썼다. 둘러보니 객실 안에서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20.03.14.

하늘은 파랗고 햇볕은 따뜻했던 14일, 늦은 산책을 나서다가 벤치에서 조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저 고양이를 절대로 놀라게 해선 안 돼, 항상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멀리서부터 조심조심 한 발짝씩 다가가면서 망원으로 촬영하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올림푸스 14-42 ez 렌즈를 물린 파나소닉 gf2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가는데, 이 고등어무늬 고양이는 미동도 없었다. 뭐지? 벤치 반대쪽 끝에 앉아 본다. 그래도 고양이는 애옹애옹 소리만 낼 뿐 가만히 있다. 이만큼 가도 괜찮아? 이만큼도? 요만큼도? 요오오만큼도?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어도 가만히 있다가, 한참 뒤 폴짝 내려가 보도를 걸었다. 그러곤 또 그 자리에 앉았다.

한 바퀴 산책을 마치고, 물론 당연히 기대 같은 건 없었지만, 아까 걔 혹시 없나, 둘러봤다. 아까 있던 자리엔 없다. 그런데 거기서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팔자 좋게 늘어져 있는 게 보였다.

2020.03.14.

아마도 아파트 사람들이 잘 돌봐주는 모양이다. 귀 한쪽 끝이 잘린 것을 보니 중성화 수술도 받은 것 같고. 요괴워치에 나오는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눈 위 무늬가 인상적이다.

얘 닮은 것 같은데…

어느새 3월 중순이라고, 홍매화도 피었고 땅엔 푸릇푸릇한 풀잎사귀도 제법 났다. 팍팍하기만 한 삶은 언제 나아질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지구 북반구에는 봄이 문지방을 넘어 들어왔다. 봄이 오고 있는데 나만 겨울잠을 자고 있는 건 아닐까(주: 안예은 노래 ‘홀로봄’의 가사) 하는 생각도 매일매일 하지만, 그래도 용기 비슷한 것을 내서 또 버틴다. 존버는 승리한다.

2020.03.14.

 

2020.03.14.

 

2020.03.14.

고양이가 있다면 그래도 어떻게든 된다. 내겐 고양이가 없지만.

@Boktheseon

 

번외. 서울 오는 길, 휴게소에서 만난 고양이들.

2020.03.15.

 

2020.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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