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도시탐조] 새를 보려거든 새길보단 샛길로 @서울 봉산

지난 번 공원 탐조 나들이 때 쇠딱따구리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한 게 아무래도 아쉬워서, 가까운 공원이나 야산 중에서 딱따구리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마침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 ‘봉산’이라고 하는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길래 한 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땐 몰랐다. 내 체력이 고작 그만큼의 산행(이라고 하기에는 좀 민망한 무언가)도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저질이라는 사실을.

2022.01.09. 서울 구산근린공원에서 마주친 고양이.

이번 여정에는 새로 산 올림푸스 MC-20 2배 망원 컨버터를 대동했다. 40-150 pro 렌즈나 300 pro 렌즈의 뒤에 장착해 초점거리를 두 배로 연장할 수 있는 장치다. 조리갯값도 두 배가 된다는 것이 흠이긴 한데, 마스터 렌즈인 40-150 pro 렌즈가 150mm(135판 환산 300mm 상당)에서 F/2.8을 유지하기 때문에 아주 부담스럽지는 않다. 135판 환산 600mm 상당 화각에서 F/5.6 수준의 조리갯값은 동급의 다른 렌즈들과 비교하면 나쁜 수준은 결코 아니다.

등산로는 은평구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의 일부를 이룬다. 그 말은 그만큼 난도도 낮다는 뜻. 내가 찾은 구간은 서북병원 근처 구간인데, 산으로 진입하는 부분을 비롯해 일부 경사가 급한 구간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등산’보다는 ‘트레킹’에 가까운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일요일이었던 9일 오후에도 연령대 불문 수많은 탐방객이 산책하듯 걷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한참을 걸었는데도, 초입에서 직박구리 소리를 잠깐 들은 것을 제외하면 새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귀를 세워도 탐방객이 몸 앞뒤로 팔을 흔들면서 손뼉 치며 걷는 소리, 음량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인지 뭔지 모를 것의 소리,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 등등 사람이 만드는 소리가 전부였다.

2022.01.09. 직박구리를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무작정’ 온 거라지만 지나치게 무작정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무턱대고 무슨 자연인처럼 나무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것도 안 될 일. 그냥 딴 데를 찾아볼까… 하던 내 눈앞에 샛길이 보였다. 아마도 봉우리를 우회해서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인 듯했다. 불과 몇 발짝 밟아 나갔을 뿐인데도 멀리서부터 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이렇게 극적으로 바뀐다고?

삐익, 하는 소리는 직박구리 소리가 틀림없다. 딱, 딱, 목탁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겹쳐서 난다. 좀 인공적인 느낌도 없지 않긴 하지만, 아무래도 딱따구리 소리 같다. 행여 내 발소리가 새들의 심기를 거스를까 조심조심, 그렇게 나아간 수십 미터. 나무 몇 그루가 쓰러져 있고, 성한 나무와 쓰러진 나무 사이 어딘가에서 목탁 소리가 반복된다. 아주 가깝다. 빨간 머리가 쓰러진 나무 위로 언뜻언뜻 비친다. 정말 운 좋게도, 그 나무는 오솔길에서 불과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조심히 카메라를 들었다.

2022.01.09. 빨간 머리가 인상적인 큰오색딱따구리 수컷.
2022.01.09. 나무를 쪼다가 잠깐 쉬는 큰오색딱따구리 수컷.
2022.01.09. 큰오색딱따구리 암컷. 머리가 까맣다. 저 하얗게 보이는 부분은 다 쟤가 파낸 것이다.

처음엔 이 새가 ‘오색딱따구리’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어느 분이 지적해 주셔서 알았다. 배에 검은 무늬가 있으면 큰오색딱따구리고, 오색딱따구리는 배에 그런 무늬가 없이 하얗다고 한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한편 딱따구리를 ‘탁목조’라고도 한다는데, 혹시 소리가 비슷한 ‘목탁’을 뒤집은 게 아닐까도 생각해 봤다. 아쉽게도(?) ‘탁’ 자에 쓰이는 한자가 다르다.

딱따구리들에게는 그 자리가 상당히 좋은 자리였던 모양이다. 내가 넋을 잃고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큰오색딱따구리 수컷과 암컷이 번갈아 나타나더니 조금 뒤엔 큰오색이들보다 몸집이 큰 청딱따구리도 날아들었다. 다만 청딱따구리는 진득하게 머물지는 않고, 잠깐 이 나무 저 나무 돌아다니며 살피다가 곧 가버렸다. 딱따구리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 주변을 박새 두어 마리가 맴돌다 갔다. 사람은 딱 한 명 지나갔다.

2022.01.09. 청딱따구리.
2022.01.09. 주변을 둘러보는 청딱따구리.
2022.01.09. 청딱따구리 얼굴 정면.
2022.01.09. 나무 조각을 팍팍 튀기는 큰오색딱따구리.

모든 게 좋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MC-20 컨버터를 장착한 상태에서는 화질, 특히 해상력 쪽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F/5.6이 최대 개방 조리갯값이라서 상의 날카로움이 덜할 수 있다는 건 각오하고 있던 부분이지만, 찍힌 결과물을 확대해보고 나서, 뭔가 초점이 안 맞은 것 같은, 그런 종류의 흐리멍덩한 느낌을 받으며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컨버터 없이 촬영해서 2배 확대하는 것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 물론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진 아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자동초점 기능이 좀 헤매는 것 같기도 하다.

2022.01.09. 초점이 하도 안 잡혀서 결국 MF로 촬영한 박새.

이날 그렇게 많이 만난 딱따구리는 평소엔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걸까? 봉산에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산을 내려온 뒤 잠깐 들른 구산근린공원에서도 큰오색딱따구리를 만났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도로변 가로수에 쇠딱따구리가 붙어 있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혹시 알게 모르게 여기저기 많이 있었는데 그냥 내가 못 보고 지나친 건 아니었을까? 새를 만나면 만날수록 그런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세계의 해상도가 다시 한 번 높아진 것 같은,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약간의 책임감 비슷한 것도 더해진 것 같은 그런 기분으로, 지는 해를 보며 돌아섰다. 막판에 들었던 지이익-뺴뺴뺴뺴!! 하는 물까치 소리가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그리고 나는 며칠간 몸살을 앓았다. 휴대폰에 찍힌 걸음 수는 1만 보에 불과했고, 오른 층수는 70층이었다. 역시 모든 것의 시작은 체력인 것이다.

2022.01.09. 물까치.

@Bokthe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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