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봄꽃을 즐겨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으로 @서울 이곳저곳
아무튼 또 봄꽃들이 피어났다. 어릴 땐 대체 벚꽃놀이를 왜 가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는데(모부 손에 이끌려 벚꽃놀이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안다. 이 계절이 선사하는 화려함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시간은 비가역적이고, 나는 오늘도 시시각각 죽음에 가까워져가고 있으며, 그러므로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것은 나에 대한 일종의 ‘의무’라는 것을.
내 기억 속 4월은 황사와 미세먼지가 뒤덮곤 했던 그런 시절이었는데, 다행히 올해 4월은 상당히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기온도 적당히 올라와서, 이제 두꺼운 외투 없이 가벼운 옷차림만으로도 야외의 상쾌함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국이 아니었다면 텀블러에 커피와 얼음을 채워갖고 다니면서 걷다 마시다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다. 그런 것을 그리워하지 말자.
궁궐에 매화 피는 계절
지난 3일엔 이 시절 홍매화가 만발하는 창덕궁을 찾았다. 돈화문 앞에는 두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하나는 매표소 줄, 다른 하나는 입장 줄. 교통카드가 있다면 그냥 찍고 들어가면 되기 때문에 굳이 매표소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데, 이게 정말 편리하다. 은근히 이런 식으로 대중교통 이용을 장려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날의 주인공은 명백히 궁 자체가 아니라 궁역에 핀 꽃이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물론 아니어서, 꽃을 주렁주렁 풍성하게 달고 있는 나무가 있다면 으레 그 앞에 긴 줄이 생기곤 했다. 예쁜 것을 보면 나도 예뻐지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 그런 자기 모습을 남기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삶이고 기록이니까―(끄덕).
홍매화가 유명해서 그렇지, 낙선재에서 보는 백매화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특히 낙선재의 열린 문을 통해서 바라보는, 봄 햇볕을 머금은, 상대적으로 어두운 방과 프레임 가장자리로 비켜난 창호지의 느낌과 대비되는 매화가 참 좋다. 가끔 바람이 불어 흰 꽃잎이 흩날리면, 담벼락 위 기왓장을 스쳐 지나가면, 이 시간을 영영 흐르지 못하게 가둬놓고 싶다.
창덕궁에 왔는데 창경궁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있나. 창경궁은 꽃나무보다는 단풍과 낙엽이 더 잘 어울리는 공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창한 봄날의 기운이 나빠질 리는 없다. 산수유의 노란 꽃이, 버드나무의 연둣빛 싹이, 발밑에 솟아난 들풀이 반긴다.
춘당지의 원앙들은 아주 신이 났다. 수컷들끼리 쫓고 쫓기는 놀이(?)를 하기도 하고, 자맥질을 하다가 날개를 퍼덕이기도 한다. 한쪽 구석에는 짝짓기를 하는 커플도 있다. 다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을 무시하고 자꾸 먹이 같은 것을 던지는 일부 사진사의 행태가 그 분위기를 흐릴 뿐이다.
박새 한 마리가 숲을 뒤진다. 지난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아직도 바스락 소리를 낸다. 감을 따갖고 가던 청설모는 어디 있을까? 고양이는 잔다.
벚꽃놀이를 즐길 의무
여의도 벚꽃길이 3년 만에 열렸단다. 무언가 이 지겨운 역병의 시대가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걸까? 글쎄, 그건 아마 두고 봐야 할 일이 아닐까 싶지만, 아무튼, 매화 다음에는 벚꽃이 찾아오는 법. 단 며칠 만에 불광천 양안이 온통 벚꽃으로 물들었다. 흰색이라기엔 붉고 분홍색이라기엔 흰 그 은은함이 좋다. 단 며칠 만에 피었듯이 단 며칠 만에 져버리는 것은 슬프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이 순간을 누려야지.
정말 오랜만에, 불광천에서도 봄꽃 행사가 열렸다. 9일, 불광천 응암역 근처에서는 물 한가운데의 임시 무대를 점검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입구에서 손소독제를 받아 양손을 닦고, 3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인구밀도 사이로 들어갔다. 날은 훈훈했지만 바람이 꽤 세게 부는 편이었는데, 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벚꽃잎이 그 바람에 날려 꽃비가 되어 떨어졌다.
하도 사람이 많아서 새들이 어디 멀리 가버렸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직박구리 두어 마리가 뺙뺙 소리를 내며 벚나무 가지에 앉았다. 한 마리는 꽃에 머리를 집어넣고 꿀을 먹고 있었다. 원래 사람을 그다지 겁내지 않는 직박구리들답게, 그냥 막 정신없이 이 꽃 저 꽃 바꿔가며 머리를 들이댔다. 한참을 그러다가 예의 그 “뺙!” 소리를 내면서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벚꽃을 좋아하는 새는 물론 직박구리가 전부가 아니다. 부리가 짧아서 직박구리처럼 할 수 없는 참새들은 꽃을 똑똑 잘라서 아래에서 꿀을 내 먹는 방식을 쓴다. 가지에 앉은 채 꽃을 물고 있는 참새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꿀을 다 먹고 나면 꽃은 가차 없이 버린다. 꽃은 꿀만 내준 채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며 바닥에 떨어진다. 꿀벌 입장에서는 조금 속상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나온 김에 비단산도 들러보기로 했다. 불광천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인데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고 아주 조용했다. 쇠박새 우는 소리가 아주 쩌렁쩌렁 울렸고, 어디서 퓌이-퓌이- 하는 딱새 소리도 들렸다. 무슨 맹금류 우는 소리도 또 들린다. 물론 진짜 맹금류가 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난번에 끼-끼-끼-끼-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길래 추적해 본 결과, 그건 어치가 흉내 내는 것이었다. 아마 마찬가지겠지.
직박구리 한 마리가 자목련 꽃잎을 뜯어먹고 있었다. 하긴, 그건 확실히 먹을 게 많긴 하지. 맞은편의 백목련은 이제 흰 꽃잎을 절반쯤 땅에 떨어뜨린 상태였다. 아직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아주 희고 고왔다. 목련나무 주변을 하얀 꽃잎들이 덮었는데, 그게 마치 조명 같았다. 아래에서 위로 쏘는, 그런 유형의. 어디서 나타난 직박구리 한 무리가 삐익-삐익- 울면서 나뭇가지 사이를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한 마리는 입에 말벌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물고 나타났다. 그건 또 어디서 잡은 거야?
사람은 한때의 즐거움으로 고단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다. 내려와서 빵을 한 봉지, 커피 원두를 한 봉지 사서 천천히 천변을 걸었다. 다음 주면 없어질 올해의 벚꽃 풍경을 잘 새겨둬야지. 꽃이 다 져버리더라도 아쉽지 않게.
@Bokthe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