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꽁꽁 언 연못 위로 잔설이 깔려 있고, 나무 그림자가 그 위에 드리웠다. 화면 위쪽에는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꽁꽁 언 연못 물과 빵빵 찐 동물 털 @창덕궁 후원&창경궁

창덕궁에서 잔설을 삽으로 치우는 관리원.
2023.01.27. 눈 치우는 사람.

‘누가 봐도 좋은 기회’는 이미 누가 봤기 때문에 더는 ‘좋은 기회’가 아니다. ‘나만 아는 좋은 것’은 웬만해선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 아주 호불호가 갈리는 게 아닌 이상(예를 들면 내가 매우 좋아하는 파인애플피자) 대체로 내게 좋은 것이 남에게도 좋고, 남에게 좋은 것이 내게도 좋기 때문이다. 이런 명제는 장소에도 곧잘 적용되는데, ‘명소’가 괜히 명소인 게 아니라는 것을 늘 새롭게 깨달아가고 있다.

창덕궁에는 자주 갔지만, 창덕궁 안에 있는 후원에는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내가 가려고 할 때마다 늘 이미 관람 가능 인원이 다 차서 입장권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월의 마지막 금요일, 이번에도 후원까지 가볼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애초 가려고 했던 곳도 창덕궁이 아니라 창경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연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역시 금요일에 쉬는 날이 있다는 게 이점이 크다.

창덕궁 후원은 조선시대 ‘동궐’이라 불리며 경복궁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녔던 창덕궁에 조성된 조선 왕실의 정원이다. 지도에 표시되는 창덕궁의 어마어마한 넓이는 사실 후원의 영향으로, 현존하는 전각 구역보다 후원의 넓이가 훨씬 넓다. 함양문 앞 매표소에서 별도의 입장권을 사야 하는데, 입장권을 샀다고 해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설자의 인솔을 받아야 한다. 관람객 입장에서야 불편하긴 하지만, 문화재로서나 얼마 없는 귀한 도심 숲으로서나 역시 사람 발길이 많이 닿지 않는 게 보존에 도움이 될 터다.

네모난 연못이 하얗게 얼어 있고, 주변에 관람객들이 있다. 연못 너머엔 주합루 건물이 서 있다.
2023.01.27. 부용지와 주합루.

입구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들어가면 부용지와 그 뒤의 주합루가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몹시 추운 날이었다. 부용지의 물이 몽땅 얼었고, 그 위로 하얀 잔설이 깔려 있었다. 여름이면 연꽃이 수면을 덮는다고 하는데, 물론 그걸 검증하려면 여름에도 와서 직접 봐야 되겠지.

주합루는 부용지 한쪽 변의 언덕 위에 들어선 2층 누각인데, 건물까지 올라가는 꽤 가파른 계단길 때문에 실제 규모에 비해 상당히 웅장하게 보인다. 보통은 연못가에 서서 주합루를 올려다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1층에는 ‘규장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정조의 그 규장각이다.

부용지에 다리를 드리운 부용정. 기와지붕에 잔설이 쌓여 있다.
2023.01.27. 부용정 지붕에 눈이 쌓여 있다.

정조 때의 규장각은 세종 때의 집현전과 비슷한 하나의 국책연구기관 같은 존재였다고 역사 시간에 배웠는데, 어, 앞에서 분명 후원은 조선 왕실의 정원이라지 않았는가. 1층이 서고에 가까운 역할을, 2층이 열람실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 이곳에서 일하던 신하(특: 공무원임)들에게는 좋은 일이었을까, 나쁜 일이었을까? 어쩌면 사각의 부용지와 그 가운데 마련된 원형의 섬을 내려다보며 천원지방 이 세계를 전부 망라하는 정책을 연구하는… 뭐 그런 의미도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창덕궁 후원은 ‘단일한 공간’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아니 굳이 묶자면 ‘후원’이라는 공간으로 묶이는 건 맞는데, 내부를 들여다보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취락처럼 연못 몇 개와 그 주변의 전각 몇 동씩을 한 단위로 하는, 그런 구역들이 늘어선 것처럼 보인다. 부용지 다음은 애련지, 애련지 다음은 관람지, 이런 식으로. 부용지도 연꽃 핀 풍경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애련지는 아예 이름에 연꽃을 뜻하는 ‘蓮’ 자가 들어가 있다. 해설사는 이렇게 말했다.

“여름에 또 오시면 됩니다!”

꽁꽁 언 연못 위로 잔설이 깔려 있고, 나무 그림자가 그 위에 드리웠다. 화면 위쪽에는 정자가 하나 서 있다.
2023.01.27. 창덕궁 후원 애련지 수면 위로 육박하는 그림자.

이 영업 멘트는 잠시 뒤 관람지 구역에서 반복됐다.

“가을이면 이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서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된다? 가을에 또 오시면 됩니다!”

한반도 모양의 관람지 주변을 한 바퀴 돈다. 한반도 모양을 의도하고 조성한 건지, 아니면 그냥 만들다 보니까 한반도 비슷한 모양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찾을 수 있는 내용은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가 1900년대 초에 지금의 형태가 됐다는 것인데, 여기에 일제의 압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난여름 태풍에 부러진 커다란 밤나무와 벌써 꽃눈이 올라오기 시작한 매화나무를 지나, 부채꼴에서 부채꼴을 뺀 듯한(그러니까 대충 학교 수학 시간에 종종 ‘넓이를 구하시오’ 하면서 나왔던 문제 속의 도형 같은) 바닥모양을 가진 정자를 거쳐 언덕 위로 올라갔다. 정자 이름이 ‘관람정’이라고 한다. 관람정에서 관람지를 관람하는 것이다. 물론 ‘관람하다’의 ‘관람’과는 한자도 뜻도 다르다.

하얀 잔설이 쌓인 연못과 큰 가지가 꺾인 나무. 그리고 멀리 관람정이 보인다.
2023.01.27. 관람지 기슭에 서 있는, 지난 여름 태풍에 큰 가지가 꺾인 나무.
1월인데도 벌써 꽃눈이 올라와 있다. 그 너머로 보이는 관람지와 관람정.
2023.01.27. 몽글몽글 올라온 꽃눈.

이번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 원래는 북쪽으로 더 들어가서 옥류천까지 돌아볼 수 있다는데, 겨울이라 관람 코스가 단축됐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틀어 폄우사, 연경당을 거쳐 전각 영역으로 돌아가는 코스다. 여기서 부용지 쪽으로 빠져나가면 창경궁으로 넘어갈 수 있다.

창경궁 통명전 뒤쪽 언덕길에서 궁역을 내려다 본 풍경. 하늘이 맑고 땅엔 잔설이 있다.
2023.01.27. 창경궁으로 넘어와서.

대담하게 사람 지나다니는 길까지 나와 먹이를 찾는 박새 무리를 만났다. 빵실빵실한 겨울용 깃털을 하고서, 한 1m 앞까지 다가가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그냥 땅바닥 헤집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오히려 바로 옆에서 튀어나온 박새 때문에 내가 깜짝 놀라는 것이 두어 번. 무리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 있던 쇠박새가 특유의 그 우렁찬 목소리로 “삐이이!” 하고 운다.

앞서 창덕궁에서 봤던 연못들처럼, 춘당지도 꽁꽁 얼어 있었다. 그 많던 원앙은 다 어디로 갔을까? 원앙도, 흰뺨검둥오리도 없다. 다만 몸집이 매우 큰 게 특징인 춘당지 터줏대감 고양이가 관람객의 쓰다듬을 받으며 모로 누워 있을 뿐이었다. 아주 털이 빵빵하게 찐 것이, 이게 고양이인지 무슨 송태섭의 농구공인지 모를 그런 덩어리들이 궁역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추운, 그리고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나뭇가지에 앉아 무언가를 먹는 박새.
2023.01.27. 먹는 게 제일 좋아!
눈이 약간 깔린 풀밭에서 되새 몇 마리가 먹이를 찾고 있다.
2023.01.27. 되새도 먹는 게 제일 좋아
관덕정 마루에 나란히 앉아 있는 고등어 고양이 세 마리.
2023.01.27. 난 빵 굽는 게 제일 좋아

해가 참 짧았다. 고작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그림자가 길쭉해지고 잔디밭이 노랗게 물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햇빛의 농도가 낮아지면, 그 빛이 차지했던 자리를 생각이 채운다. 물론 별로 쓸데가 있는 생각은 아니다. 그렇지만 카메라에 담은 털북숭이들, 처음 본 후원의 풍경, 살짝 올라와 있던 꽃눈에 대한 기억들로 또 며칠 힘을 낼 용기를 얻는다면 그것으로 됐다. 나들이 끝.

나무 사이를 노란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다.
2023.01.27. ㅎㅎ ㅂㅂ

@Bokthe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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