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안에서 경계를 넘다 말다 @강릉 정동진
열차가 터널을 통과하자 세상의 명도가 한 단계 올라간 듯했다. 아니, 어두운 굴 속에 있다 나왔으니까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지. 아니, 그게 아니다. 구름으로 가득했던 하늘에 갑자기 구멍이 숭숭 뚫리고, 좀 전까지 차창에 부딪히던 빗방울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기분 탓일까, 뿌옇던 것도 조금은 맑아진 것 같다.
아무 생각도 작정도 없이
3월의 마지막 금요일,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순전히 즉흥적인 작정으로만 열차표를 끊었다. 처음부터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동선과 숙박을 고민하지 않고 다녀오는 쪽이 나을 것 같아 돌아오는 표는 같은 날 저녁 시간대로 잡았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서울에서 출발해서 KTX-이음 열차를 타고 동해안도 금방 찍고 돌아올 수가 있다. 옛날엔 청량리에서 출발해서 영동선, 태백선을 돌아 무슨 스위치백 구간도 지나며 여섯 시간쯤 걸려 닿을 수 있었던 거리를 이제는 서울역에서 출발해 두어 시간 앉아 있으면 도착하게 되니, 여정의 무게가 달라졌다고 할까.
정동진역은 여전히 단출한 간이역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불과 수십 미터 떨어져 있을 뿐인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이 조그만 건물 하나가 소나무와 함께 받아내고 있다. KTX가 정차하는 역인데도 실제로 사용되는 플랫폼은 단 하나. 강릉역 또는 동해역으로 가는 누리로 열차를 포함해 거의 한 시간에 두 대씩은 꼬박꼬박 열차가 멈추는데, 그런 것에 비해 그다지 붐비거나 바빠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평일인 데다 해돋이 시간대도 아니어서 그런 모양이다.
플랫폼에서 눈앞,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지만, 바다로 곧장 나갈 수는 없다. 일단은 역사를 통과해 밖으로 나온 뒤, 남쪽으로 조금 돌아서 가도록 한다. 아직 ‘봄’이라고 하기에는 공기는 쌀쌀한 편이다. 다른 꽃은 아직, 역 앞에 ‘포토존’이라고 만들어 놓은 자리 주변으로 개나리만 샛노랗게 피어 있다. 아직 바닷가에는 닿지 않았는데 벌써 파도 소리가 들린다. 실은, 파도 소리가 아니라 바람에 나무들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다. 삐-삐- 하는 딱새 소리가 겹친다.
아직은 겨울의 끝자락, 봄의 문지방을 넘기 직전 같은 날씨였다. 멀리 보이는 산맥에도 며칠 전 내린 눈의 흔적이 얼핏 보이는, 그런 날. 푹푹 빠지는 모래를 밟고 걸어가 물가에 섰다. 이날따라 유독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멀리서부터 도움닫기하며 달려온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물방울을 쏟아낸다. 거무튀튀한 바위의 몸통 이곳저곳에 물이 고인다. 고개를 들면 물빛은 점점 아득해진다. 마루와 골 사이를 오르내리며 까딱까딱하는 부표 근처로 갈매기 몇 마리가 날았다.
일단은 남쪽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산 위에 커다란 배가 얹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발을 뗐다. 묵호-동해로 가는 영동선 철길이 오른쪽으로 나란히 가다가 모래시계 근처에서 내륙 쪽으로 휘어 들어간다. 다만 열차가 다니지는 않는 다른 철길이, 영동선과 헤어진 뒤로도 얼마간 함께 걸어준다. 그렇다고 기능을 잃고 형태만 남은 ‘가짜’라고 할 수는 없다. 레일바이크 코스로 이용되고 있으니 아무튼 철길의 기능 자체를 아주 잃지는 않은 것 아닌가. 다만 이날은 레일바이크가 지나가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시간, RE:WIND
철길 한쪽으로는 옛 열차 한 편성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시간박물관’이라는 것이 서 있다. 아무래도 ‘모래시계’로 가장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이 박물관이 있는 광장 한가운데에는 1년에 한 번 뒤집는다는 거대한 모래시계가 있고, 또 화살 모양을 한 해시계도 자리해 있다. 시간박물관의 맨 앞에는 증기기관차가 연결돼 있는데, 증기기관차를 붙여놓기엔 객차 차량들과 너무 시대 차이가 나서 좀 어색하다. 이것도 시간을 건너뛴다는 의미라고 생각하면 그런대로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홈페이지에 설명된 바에 따르면 2013년에 개관했다고 하고, 서울 화랑대 철도공원에도 일종의 분관(?) 같은 것을 두고 있는 모양이다.
시간에는 경계가 없고 모든 순간은 연속적이다. 하지만 시계를 가져오는 순간 시간은 시, 분, 초 단위로 쪼개진다. ‘단위’가 포함된 모든 측정 도구가 그렇다. 23시 59분 59초와 0시 0분 0초 사이에 흐른 것은 단지 1초뿐. 그렇지만 날짜를 기준으로 하는 인간의 많은 활동에서 큰 차이가 생기곤 한다. 0시를 기준으로 초기화되는 트래픽이라든지, 유튜브 최초공개 영상과 채팅창의 동시성이라든지,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라든지,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라든지, 일요일은 쉬고 월요일은 출근하는 패턴이라든지. 인간은,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기대서 그런 것을 다 약속하고 사는 것이다. 새삼, 문득, 신기.
해시계, 물시계, 불시계부터 첨단 원자시계, 시계라기보다는 일종의 시간을 주제로 한 공예품에 이르기까지 열차 7량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둘러본 뒤 열차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전망대로 올라갔다. 3~4층 정도 높이에 불과하지만, 썬크루즈호텔 정도를 제외하면 이 근방에서 가장 높은 자리다. 아까는 몇 마리만 드문드문 보이던 갈매기들이 무리 지어 해안에 앉아 있다. 파도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맞춰서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것이 퍽 귀엽다. 두어 마리가 날아올라 해변을 빙 둘러 한 바퀴 날고 다시 앉았다.
여기서 달리 어딜 나갈 작정은 없고 열차 시간까지는 꽤 남았으니 해변을 좀 더 걸어보기로 한다. 모래시계가 있던 광장에서 정동진천을 건너 더 남쪽으로 가면 정동진항, 그리고 바다부채길이 나온다. 더 남쪽의 심곡항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표를 끊어서 들어가면 뭔가 뽕을 뽑고 싶어질 것 같아서 본격적인 코스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갔다가 되돌아왔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냥 의미 없이 같은 구간을 왕복하기만 한 모양이 됐는데, 뭐 어때, 애초에 아무 생각도 작정도 없이 왔는데.
경계를 넘다 말다
다시 역 주변까지 왔다가, 강릉에 왔는데 커피를 안 마시고 갈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전에 조사한 건 없고, 뭔가 오래됐을 것 같은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테라스가 딸린 2층 목조 건물이었다. 그 큰 건물 안에 손님이라곤 나뿐이었다. 드립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그리고 커피건빵이라는 것이 있길래 하나 샀다. 계단을 올라 창가, 바깥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정동진역, 철길, 그리고 바다가 훤히 펼쳐졌다. 다른 소음도 없는 그 공간,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기댄다. 슬슬 해가 기울어져가는, 평일의 늦은 오후였다.
날의 경계를 넘기 전, 서울역 가는 저녁 열차에 올랐다. 다시 산맥을 넘어 돌아가는 길, 자다 깨다를 반복한 탓에 차창 밖 풍경이 기억나지 않는다. 바로 다음날 찾은 창덕궁은 홍매화가 만발이었다. 아무튼 계절의 경계를 넘긴 넘은 모양이다. 3월의 마지막 주말이었다.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