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창덕궁 전각의 기와지붕을 배경으로 노란 산수유꽃이 포커스 아웃된 채 드리운 모습.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봄꽃, 기후 위기, 설레발, 조급증, 김칫국 @창덕궁

인정해야겠다. 내가 성급했던 게 맞다. 2월의 이상고온으로 꽃 피는 시기가 한참 당겨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지난해 3월 10일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나머지 그전까지의 사례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것도 맞다.

방화수류정 근처에 흰 매화가 피어 있다. 나뭇가지에는 꽃망울이 몇 개 달려 있다. 화성 성벽이 뒤로 지나간다.
2023.03.10. 경기 수원 방화수류정 근처에 매화가 피어 있다.
매실나무 가지에 매화가 몇 송이 피어 있다. 활짝 핀 것은 가운데의 몇 송이뿐이고 나머지는 봉오리 상태다.
2024.03.09. 서울 청계천 매화거리에서 마주친 매화.

건방지게도 3월 둘째 주말에 서울 청계천 매화거리에 가서는 매화가 안 피었다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매화가 아주 안 핀 것은 아니고 가지 한두 개 정도에는 활짝 핀 매화가 달려 있었는데, 이걸 보고서 ‘음, 다음 주쯤에는 볼 만하게 피겠는데?’ 하고 멋대로 생각했던 것이다. 한 주가 지나봐야 여전히 3월 중순인데 매화가 만개? 말이 안 되는 얘기다.

2022.04.03. 창덕궁 백매화.

사실 최근 몇 년간의 경향성을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정도의 호들갑은 아니다. 계속되는 기후 변화로 인해 지난겨울의 기온이 역대 2번째로 높았던 것이 그 근거다. 이미 농촌진흥청도 사과꽃이나 배꽃이 너무 일찍 피어 꽃샘추위에 취약해질 수도 있다는 경고를 내놓기도 했는데, 분명 전에도 여러 농가에서 꽃이 너무 일찍 피면서 갑작스러운 기온 하강을 견디지 못하고 언피해를 보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른 개화에 대한 우려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변화의 속도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도 혼란을 더하는 요인이 됐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했었다. 한 학기가 15~16주고 중간고사가 7~8주차쯤에 치러지니 시험공부 때문에 괴로울 시기는 4월 중하순쯤. 그러니까 서울에서 벚꽃이 만개하는 시기가 대충 그 무렵이었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2008년에는 여의도 벚꽃축제가 4월 16일에나 시작했었다(관련 기사). 그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서울 지역의 평년 벚꽃 개화일은 4월 8일이었는데 실제 개화는 2주나 이른 3월 25일에 이뤄졌다.

2018.03.31. 전주 삼천변의 벚꽃이 피고 있다. 불과 6년 전인 이때만 해도 다들 ‘3월에 벚꽃이 만개하다니, 말이 되나?’라고 했었다.

해마다 개화 시기가 앞당겨지면서 이에 맞춰 꽃 축제 일정을 전보다 한 주 정도 당겨 잡았던 지자체들은 난리가 났다. 제주도부터 강원도까지, 개나리부터 벚꽃까지, 온갖 축제란 축제가 다 어긋났다. 강원 속초시는 인스타그램 계정에 “죽을죄를 졌습니다. 하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담긴 게시물을 올리고 영랑호 벚꽃축제를 한 주 연장, 2차례로 나눠 치르겠다고 밝혔다.

최근 몇 년 동안이 너무 일렀던 거고 실제로는 이 속도가 맞아, 라고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너무 찜찜하다. 그럼 내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갑자기 내년이 되면 또 엄청난 이상고온으로 인해 3월 중순에 봄꽃이 다 피고 갑작스런 꽃샘추위로 2~3일 만에 다 져 버리고, 이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예측이 안 된다는 점이다.

창덕궁 전각의 기와지붕을 배경으로 노란 산수유꽃이 포커스 아웃된 채 드리운 모습.
2024.03.16. 창덕궁에서 만난 산수유꽃.

물론 그런 것을 감안해도 내 예측이 성급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 일. 3월 16일, 창덕궁의 매화는 한 송이도 제대로 핀 것이 없었다. 홍매화 시절이면 나무마다 빙 둘러싸고 사진 찍는 관람객으로 늘 붐볐던 함양문 앞 공간에는 아직 꽃봉오리가 팥알만큼도 올라오지 않은 매화 가지만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다만 마침 창호 개방 행사 기간이라, 꽃 대신 활짝 열린 전각을 보면서 아쉽지는 않을 수 있었다. 창호 개방 행사에는 ‘빛·바람 들이기’라는 부제가 붙었다. 지금은 사람이 일상적으로 드나들지 않는, 안쪽까지 들여다보기 어려웠던 옛 궁궐 건물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새로운 볼거리였다. 이를테면 대조전 안에 놓인, 자개로 장식된 가구들 같은. 열린 문을 통해 빛을 받으면서 어두운 방 안에서 가구에 박힌 자개가 영롱하게 빛나는 그 모습에서 시선을 어찌 금방 뗄 수 있을까.

어두운 방 한가운데 놓인 자개 의자와 테이블. 그 뒤로 열린 문을 통해 밝은 언덕이 보인다.
2024.03.16. 창덕궁 대조전의 자개 가구.

건물 내부 그 자체뿐 아니라 열린 문을 통해 공간과 공간이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점도 신선했다. 평소에는 열린 모습을 보기 힘든 궁궐 전각이 사이에 있으니 뭔가 다른 차원의 공간이 연결된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든다. 이쪽에서 사진을 찍고 있으면 반대편에 다른 관람객의 실루엣이 쑥 하고 들어오기도 한다.

창호 개방 행사가 진행 중인 창덕궁의 한 전각. 맞은편에 사람 실루엣이 보인다.
2024.03.16. 이렇게.
2024.03.16.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 사이를 잇는 복도.

그러나 늘 그렇듯 내게 있어 창덕궁 관람의 끝은 함양문 너머 창경궁이다. 창호 개방을 보러 온 관람객이 많았던 창덕궁과는 달리, 금요일 오후의 창경궁은 한산했다. 아직은 겨울철의 깃털을 벗지 않은 채 춘당지에 머물고 있는 원앙 무리와, 한낮의 심심한 고양이들이 반기는 그곳.

연못 한가운데 섬에 있는 바위에서 원앙 암수 한 쌍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다.
2024.03.16. 어머나…

그러고서 벌써 2주가 지나 3월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꽃들은 이제야 제 모습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필 꽃은 피고 올 봄은 온다는 것일까, 그래도 아직은.

+추가: 3월 30일의 창덕궁은…

기와지붕 앞에 홍매화가 피어 있다. 꽃잎 몇 개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2024.03.30. 창덕궁 홍매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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