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정심 찾기: 일상은 조금 단조로울 필요도 있다
금요일 출근 땐 폭우 퇴근 땐 황사였는데
갑자기 좋아진 날씨에 그저 ‘어안이벙벙’
이런 날 며칠이나 되겠나 싶어 디딘 걸음
고작 생각해낸 곳이 불광천에 마포대교
오늘도 내일도 똑같은 365분의 1년일 뿐
일관성도 꾸준함도 없이 요행만 바라나
날씨가, 좋아지든지 나빠지든지 그냥 좀 적당히 평이하게 진행되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이 기후위기의 시대에 그런 것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그러니까, 한 주 전 금요일인 지난 7일엔 출근길에 폭우가 쏟아졌다. 아침에 나올 땐 그냥 좀 흐리기만 하겠거니 싶어서 우산 없이 출근했다가, 버스정류장에서 회사 건물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빗줄기에 풍덩 빠져버렸다. 횡단보도 신호가 뭐 그리 긴지. 도무지 손바닥으로 정수리를 가린다고 뭐가 될 게 아닌 상황에서 마침 어느 지나가던 분이 우산을 드리워주셔서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날 아침은 그랬는데, ‘대체로 비 온 뒤 하늘은 청명하다’는 그런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퇴근 무렵에는 고농도의 황사가 몰아닥쳤다. 고 먼지가 지나가기는커녕 토요일까지 집어삼키더니, 일요일이 되자마자 갑자기 ‘이 이상 좋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맑아졌다. 이럴 수가 있나? 마치 골이 터지는 날에는 해트트릭을 때려 넣더니 그 뒤로 한 450분쯤 침묵하다 뜬금없이 두어 골 넣고 다시 잠적하는 유형의 골잡이 같다. 일관성이 없다.
하여간에, 그래서 도저히 집 안에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밖으로 기어나온 지난 9일이었다. 불광천엔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많았다? 아니,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와 비교하면 사실 ‘많다’고는 할 수 없는 규모이긴 했다. 어디 다른 델 가셨나, ‘가정의 달’이니 아무래도 동네 마실보다는 좀 본격적인 나들이 쪽을 많이들 선택했으려나, 이런 생각을 하며 산책로로 내려갔다. 이 시기의 주인공은 이팝꽃이다. 달달헌 향을 은은하게 흩날리는 흰 쌀밥들이 원색에 가까운 파아란 하늘 아래 피는 계절이다. 원래는 그런데, 이젠 그런 ‘은은한’ 정도의 향은 마스크에서 걸러지고 마니 아쉽다.
때가 됐는데 돌아오지 않은 것도 있다. 지난해 이맘땐 오리들이 솜털이 부숭부숭한 새끼들을 이끌고 냇물을 휘젓고 다녔는데, 올해는 새끼오리를 한 번도 못 봤다. 새끼오리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냇가에 갈 때마다 허탕을 치니 아쉬움이 여러 겹 쌓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 어쩌면 그냥 나만 못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그냥 그쪽인 것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오리 대신 왜가리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늘 그렇듯 멍-하니 서 있다. 분수대의 물 나오는 구멍이 궁금한 모양이다. 그 자세로 계속 구멍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뜨신 햇볕 아래서 걸으려니 어쩐지 목이 좀 탄다. 늘 들르던 카페를 찾아가는데, 아이고, 이 동네 사람들 다 여기 있었구나. 가게마다 자리가 없어 전쟁이다. 야외 테이블까지 사람이 가득가득 들어찼다. 한 집, 두 집, 세 집…을 지나 드디어, 용케도, 가게 내부 자리가 비어 있는 카페를 찾아냈다. 바깥 자리는 역시 만석이었지만, 어쩌면 그 때문에 다들 지레 겁을 먹고 진입을 포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들어가 놓고 보니 마침 동네에서 꽤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영업 중인 로스터리 카페였다. 과테말라 원두 이백 그램을 홀린 듯이 주문하고, 원두를 사면 덤으로 커피 한 잔을 준다기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받았다. 좀 쉴까. 자리에 앉아, 노트를 펼치고 뭘 개발괴발 적어대기 시작했다. 이게 이 장르도 주제도 알 수 없는 문자열을 쓰게 된 경위다.
생각해 보니 취재수첩이나 필사 같은 것을 제외하면 손으로 뭘 써본 지도 참 오래됐다. 일기는 잠깐 반짝 쓰다가 접고, 한참 뒤에 다시 반짝 쓰다가 접곤 했다. 손글씨 편지? 언제 마지막으로 썼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일상의 자잘한 기록은 SNS가 대체한 지 십여 년이다. 글이라고 쓰는 것도 실은 인터넷 브라우저 창을 열어놓고 생각나는 대로 의식의 흐름에 따라서 줄줄줄 써 내려가는 것이지 뭘 진지하게 고민하고 퇴고를 거치고 그런 것도 아니다. 마음을 먹고 펜을 잡아봐도 늘 진득하게 붙잡고 하질 못하고 금방 팽개치고 만다. 그러고도 내가 종이에 콘텐츠를 찍어내는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인가, 그런 생각도 하게 된다.
평온함, 꾸준함,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참 귀하다. 그렇게 자기 중심을 지키고 우뚝 서 있으려면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체력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유혹이나 자극이나 공격에 휘둘리지 않는 심리적 내성도 필요하고, 건강하게 스트레스를 풀어낼 창구도 있어야 하고, 끝없는 자기 성찰과 업데이트, 그리고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하는’ 수양… 써놓고 보니 내가 갖춘 게 한 가지도 없다. 이 일관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기후위기의 시대에 딱 어울리는 인간형이라고 주장해 본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도 좋았지만, 하필 날이 지나치게 좋았고, 짧은 시일 안에 이런 날을 또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들어가긴 아쉬운데 뭘 할까. 한강에라도 나갔다 올까. 나들이도 하던 사람이 하는 거지, 갑자기 어디 좋은 데 없나 고민하려니 생각나는 게 없다. 이 이례적으로 좋은 날에 간 곳이 고작 마포대교라니.
이날 휴대폰에 기록된 걸음 수는 1만3618걸음이었다. 전날인 토요일은 83걸음이었고, 직전 일주일 평균은 5707걸음이었다. 그래도 야마는 돌고, 일요일은 가고, 월요일은 오고, 나는 다시 365분의 1살을 먹었다.
@Bokthe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