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단풍? 낙엽? 암튼 감사합니다? @서울 창경궁, 운현궁, 경복궁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뭔가 ‘그럴싸한 것’을 해내지 못하면 죄책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걸까? 이 죄책감이라는 게 ‘무엇에 대한’ 죄책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기분’이 그럴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안 그래도 ‘내 시간’은 짧은데 그걸 고대로 게으름 앞에 갖다 바치며 흘려보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속이 쓰릴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 움직여야지!’ 하면서 갑자기 의미 있는 행동을 하게 된다든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죄책감이라는 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2021.11.02. 서울 덕수궁.

계절이 바뀌는 건 정말 순식간이다. 단풍잎 하나도 나를 기다려주질 않는다. 1년에 딱 한 번,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서울 기준)의 그 며칠 동안을 이불 속과 사무실 의자 위에서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금방 추워질 테니, 그 뒤로는 설령 의지가 생긴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이불 속과 사무실 의자 위에서만 일상을 보내야 한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단풍 구경을 다닐 수밖에.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고궁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2021년의 가을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2021.11.06. 서울 종묘

△10월 17일: 원앙의 귀환

아직 단풍 물이 덜 든 10월 중순, 서울 창경궁. 조선 4대 궁궐의 하나로서 넓디넓은 궁역 안에 숲길이며 식물원이며 없는 게 없는 곳, 어느 계절에나 고유한 매력을 온몸으로 뽐내는 곳이 창경궁. 가을의 화려함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푸른 빛을 잃지 않는 침엽수들, 낮아지는 기온에 맞춰 한껏 털을 찌운 고양이들, 그리고 춘당지에 돌아온 원앙 무리까지. 아직 활엽수 잎이 울긋불긋 타오르는 시기는 아니었기에 화려함은 가을이 깊어질 때보다는 덜한 편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빠지지는 않는다.

2020.11.15. 서울 창경궁 춘당지.
2021.10.17. 명정전 앞.
2021.10.17. 10월은 아직 푸른 빛이 더 강한 시기다.
2021.10.17. 통명전 앞.

슬슬 쌀쌀한 기운이 아침저녁으로 짙어지지만, 아직 볕이 따뜻함을 잃지 않는 시기다. 창경궁의 고양이들은 주말 낮의 햇볕을 한껏 즐기며 늘어져 있었다. 쓰다듬어대는 사람 손길이 귀찮지도 않은 건지, 아니면 사람들이 간식을 주니까 참아주고 있는 건지. 나른함을 머금은 그 털이 탐스럽게 빛나는 것이, 꼭 한 번쯤은 옆구리에 코를 묻고 크게 숨을 들이쉬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날씨가 좋으면 궁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놀고 있는, 털을 고르고 있는 고양이를 많이 만날 수 있다.

2021.10.17. “야 리모컨 가져와”
2021.10.17. 아름다운 황금 털.
2021.10.17. “밥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가을 창경궁의 진짜 주인공은 아무래도 원앙이 아닐까? 춘당지 가운데에 있는 섬이 이들의 주 서식처다. 봄에 왔을 땐 거의 보이지 않더니, 가을이 되니까 강렬한 색감의 깃털옷을 입은 수컷 원앙 여럿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무채색의 상대적으로 수수한 색을 입은 암컷들도 봄에 봤을 때보다 훨씬 기운차 보였다. 어쩌면 봄에 봤던 새끼 원앙이 이 무리 속에 있을 수도 있겠다. 그건 모르겠다.

2021.10.17. “나다.”

수면까지 내려온 소나무의 가지가 이 원앙들의 주된 놀이터로 보였다. 나무 위에서 깃털을 고르다가 물로 뛰어들어서 날갯짓을 몇 번 하다가 또 물보라를 일으켜. 전에는 못 본 안내문이 연못 주변에 붙어 있다. 원앙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내용이다. 카메라 렌즈보다 더 넓은 세상으로 가야 한다고 돼 있었다. 사진 한 컷으로 살아있는 생물을 ‘박제’하려는 사람이 꽤 많은 모양이다.

2021.10.17. 원앙 무리.
2021.10.17. 나무 위의 원앙.
2021.10.17. 딱새도 있다.

△11월 5일: 궁 아닌 궁에서

시월이 가고 십일월이 되자마자 귀신같이 예의 그 뿌연 하늘이 펼쳐졌다. 이게 다 미세먼지는 아니겠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맞을 수도 있다. 어차피 최소 KF80 수준의 마스크를 매일 쓰고 다니니 미세먼지 농도에 딱히 관심이 가지 않는 시국이긴 하지만, 그래도 파란 가을하늘을 못 본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 인간이야 그러든 말든, 단풍은 이제 본격적으로 그 색을 더해가기 시작했다. 언제였더라? 아침에 출근하면서 본 빛깔과 저녁에 퇴근하면서 본 빛깔이 확연히 다르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11월 5일, 오랜만에 일이 한가했고, 또 오랜만에 날이 쾌청했고, 그래서 점심시간에 짬을 내 운현궁에 다녀왔다. 운현궁은 이전에도 몇 번 가볼까 했던 곳인데, 이상하게 그때마다 중간에 다른 길로 새곤 하면서 결국 한 번도 못 갔던 곳이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매우 가깝지만 존재감이 좀 옅은 편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나한테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2021.11.02. 사실 그 사이에 아주 잠깐 덕수궁에 들르기도 했다.
2021.11.02. 노란 수면.

‘궁’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궁궐’과는 격이 다르다고 봐야 한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고종이 등극 전, 어릴 적에 이곳에서 지냈다고는 하나 임금으로서 이곳에서 정치를 편 것은 아니다. 흥선대원군의 위세가 고종을 능가했던 시절도 있었고 사실상 이곳에서 국가 중대사 논의가 오갔다고는 해도, 어쨌든 이하응은 왕이 아니었고 운현궁은 ‘궁’이기는 해도 ‘궐’은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주상의 생부가 사는 집이었는데 ‘그냥 사가’ 취급을 받았을 리는 없다. 한때 창덕궁으로 바로 통하는 문도 있었다고 한다. 지도를 보면 마구 헐려 나가기 전의 이 집의 규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옆 덕성여대 종로캠퍼스는 물론이고 교동초, 일본문화원, 삼환기업 건물이 있는 자리까지 전부 운현궁의 영역이었다고 하고, 마치 궁궐처럼 4대문이 있었단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도 이곳에서 치러졌다고 한다.

2021.11.05. 서울 운현궁.

입장은 무료지만 들어가려면 입장권을 끊게 돼 있다. 마당이라 할 만한 광장이 나오고,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노란 이파리들을 달고 객을 맞는다. 그 아래에선 싱어송라이터 미지니의 ‘찾아가는 공연’이 한창이었다. 객석은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는데, 삼각대와 카메라를 보니 어딘가로 송출되는 ‘비대면 공연’인 모양이었다. 하늘 색깔 그보다 더 진한 / 짙은 파란색의 향기 / 너와 나 다른 향기 같은 공간 / 이보다 중요한 게 / 어디 있겠어, 어디 있겠어. 노락당 뒷길에서 가느다랗게 떨어지는 햇살과 그 햇살을 받아 빛나는 단풍잎을 보며 들은 노래.

2021.11.05. 서울 운현궁.
2021.11.05. 운현궁 노락당 뒷길.

노안당으로 들어가는 문, 그 위 기와에 얹힌 낙엽, 그리고 그 위에 가지를 드리운 채 잎을 때때로 떨어뜨리는 나무, 그 앞에 섰다. 바람이 불면 하나둘씩 나뭇잎이 팔랑거리며 떨어지고, 그 가운데 어떤 것은 기와 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어쨌든, 가을이었다.

2021.11.05.

△11월 6일: 높은 채도로 불타오르는

다음날엔 종묘를 찾았다. 단계적 일상회복이 시작된 이후 찾아온 첫 주말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주말엔 이런 건지, 가족 단위 방문객이 정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게으름이나 피우다가 해가 조금 기운 시각에 찾아갔는데도 이 정도였으니, 한참 볕이 좋을 시각에 찾아갔다면 어땠을까?

‘묘’라는 이름이 주는 무거운 느낌이 무색하게, 정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아주 화려한 풍경이 펼쳐졌다. 길은 이미 낙엽길이다. 아직 나뭇잎이 본격적으로 막 떨어지는 시기는 아니었는데. 하늘은 흐릿했고 햇볕은 약했지만 정전 앞 은행나무가 내는 노란 빛은 눈이 딱 뜨일 정도. 마치, 무슨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처럼, 그 나무와 나무 반경 5m쯤 안이 황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곳은 최고의 포토 존. 휴대폰이든 무슨 큰 카메라든 사람들이 촬영 도구들을 들고 ‘누가 봐도 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것처럼’ 주변에 서 있는 것도 진풍경이었다. 물론 그 은행나무가 전부는 아니다. 곳곳에 빨간 단풍이 서 있거나 늘어져 있었고, 그 자리마다 카메라 든 사람들이 붙어 있었다.

2021.11.06. 서울 종묘.
2021.11.06. 서울 종묘.
2021.11.06. 서울 종묘.
2021.11.06. “비빔밥”

한 바퀴 돌아 나오며, 정문 앞 연못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새들이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가 아주 고밀도로 들려온 탓이다. 참새 몇 마리가, 연못 가운데 섬에서 수면으로 이어지는 널빤지를 타고 오르내리며 물을 마신다. 연못가 나무 위에는 곤줄박이가 와서 앉았다. 뭔가를 붙잡고 먹고 있는 건지, 그냥 부리나 깃털을 다듬고 있는 것인지는 밑에서 봐선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직박구리 두어 마리가 날아와 예의 그 “끼애액!!” 소리를 내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2021.11.06. 물 마시는 참새.
2021.11.06. 고양이.
2021.11.06. 물 마시는 직박구리.

연못 건너편에는 고양이-사실 종묘로 온 것은 이 ‘종묘냥이’를 보기 위해서였던 것도 있다- 한 마리가 낙엽을 밟으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참새들이 굳이 연못 안의 좁은 섬에 모여 있었던 건 저 고양이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그러나 역시 좋은 자리는 직박구리가 다 채 간다. 참새들이 힘겹게 물 마시는 자리도 곧 직박구리 차지가 됐다.

2021.11.06. 서울 종묘.

△11월 10일: 이제는 춥구나

가을은 오래 머물지 않을 모양이었다. 새 주가 되자마자 비가 내리고 기온이 한 단계 떨어졌다. 올해는 유독 이렇게 기온이 계단식으로 떨어지는데, 그래서 더욱 가을이 짧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트렌치코트 따위로는 이제 어림도 없고, 두꺼운 모직 코트도 찬바람을 다 막아내지는 못한다. 며칠만 지나면 여지없이 롱패딩 행이다.

2021.11.10. 서울 경복궁 향원정.

비가 잦아든 10일 낮, 경복궁 향원정으로 향했다. 4년여에 걸친 해체·복원 공사가 끝나고 다시 일반에 개방됐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나서다. 경복궁의 ‘정수’로는 아무래도 경회루가 꼽히지만, 향원정 또한 경회루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이다. 연못가를 둘러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기이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고, 연못 가운데 작은 섬에는 아담한 육각형 정자가 서 있으며, 그 너머로 인왕산과 북악산이 병풍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푸르름과 울긋불긋함에 더해 산 곳곳에 드러난 흰 바위가 어우러진다. 만약 날이 더 좋았다면, 그래서 하늘의 푸른 빛이 더 진했다면 그 조화가 완벽했을 터다.

2021.11.10. 서울 경복궁 향원정.
2021.11.10. 서울 경복궁 향원정.
2021.11.10. 서울 경복궁 향원정.

평일 낮이었는데도 유독 방문객이 많았다. 9월에 찾아온 경복궁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이날은 한복을 차려입은 무리-정말로 ‘무리’라고 할 만한 규모의-가 여럿 보였고, 예사롭지 않은 장비를 갖춘 사진사도 많이 보였다. 다들 그렇게, 가을 단풍철을 그냥 보내기는 싫었던 걸까. 물론 나도 그렇다.

2021.11.12. “힝구”

봄도 그렇지만, 가을은 늘 짧다. 여름이 정말 다 끝났나 싶을 때 잠깐 ‘가을인가?’ 하다가 곧장 겨울로 넘어가는 듯하다. 주중의 일상에 잠깐 정신을 두고 있으면 “응 나 갈게~” “난 바빠서 이만~” 하는 듯 사라지는 날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트렌치코트 입기 딱 좋은 계절이죠? 역시 모직 코트가 딱 좋을 시기네요. 두꺼운 스웨터도 필요하겠죠? 그럼 이만 롱패딩 추천을 마칩니다.

짧은 시절이라서 더 아쉽고, 그래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11월 10일에 서울에서 첫눈이 관측됐다. 그래. 이제 겨울이 온다.

2021.11.02.

@Boktheseon

LEAVE A RESPONSE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