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그저 저어한 마음에 @인천 정서진

2021.10.12. 인천 정서진.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연휴에 붙여 휴가를 하루 쓰게 됐다. 늘 그랬듯이, 무슨 계획이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2주 동안의 주 4일제 베타테스트로 주간 노동시간이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그런데도 해소되지 않은 거대하고 무거운 피로 때문에, 그저 하루쯤 더 쉬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10월 12일이었다.

센서에 먼지가 붙어서 조리개 조여 사진 찍을 때마다 신경이 쓰이던 똑딱이 카메라를 수리센터에 맡기고, 그대로 공항철도를 탔다. 목적지는 인천 정서진. ‘검암행’의 마수에 걸려 한 번 내렸다 탄 뒤 청라국제도시역에서 내렸다. 역사를 나오자마자 꽤 강한 바람이 피부에 닿는다. 시월치고는 기온이 높은 편이었고 햇볕도 따가웠지만 바람만큼은 묘하게 쌀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2021.10.12. 인천 정서진.

정서진은 청라국제도시역에서 내려 44번 버스를 타면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 버스가 배차간격이 꽤 긴 편이라는 것이 문제다. 버스가 언제 도착할지 기약이 없어, 역 광장에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잡아탔다. ‘정서진 광장’으로 가달라고 했더니, 기사님은 “정서진이요?” 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거길 찾는 사람이 흔치 않은 걸까? 글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거긴 택시보단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경우가 많은 편이죠.

정서진에는 지난해 6월 이후 1년 하고 넉 달 만이다. 정동진의 반대 개념으로 조성된 장소인 정서진은 경인 아라뱃길의 종점이자 서해와 통하는 관문이고, 국토종주 자전거길의 북서쪽 끝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많은 갈매기가 놀고 먹고 날며 지내는 곳이다. 한강공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괭이갈매기 성조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또 온몸에 회색 내지는 갈색에 가까운 얼룩이 가득한 어린 녀석들도 여럿 보였다.

2021.10.12. 갈매기들.

퍼-런, 구름 한 점 없이 마치 파란 도화지를 깔아놓은 것 같은 동쪽 하늘을 등지고, 서쪽 갯벌을 향해 발을 옮겼다. 역시 바닷가에 오면 바다에 사는 새들과의 만남을 기대하게 된다. 특히 서해 갯벌은 도시에선 보기 어려운 새들이 많이 찾는 지역. 지난해엔 여기서 검은머리물떼새를 만났었는데… 하는, 약간의 기대감을 갖고 다가갔지만, 언뜻 보니, 물이 완전히 빠진 갯벌은 아주 한산했다. 회색에 가까운, 짙고 어두운 색의 바닥만 보일 뿐이었다. 그 외에는 모두 인공물이다. 왼쪽으론 영종대교가 뻗어 나가고, 저 멀리 보이는, 아마도 영종도일 섬에는 비행기가 내려앉는다.

시간대가 애매해서 그런가? 운이 없었나? 이런 생각을 하며, 그냥 울타리 앞을 터덜터덜 걸었다. 그런데 갯벌을 계속 보다 보니 뭐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종의 암순응 비슷한, 무슨 그런 효과였을까?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대지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꾸물꾸물 걸어 다니는 갈매기가 하나, 둘, 셋, 넷… 저 멀리 왜가리도 한 마리 보이고, 저 멀리 바닷물 닿는 곳에는 어디선가 무리를 지어 날아온 새들이 내려앉았다.

2021.10.12. 인천 정서진에서 영종도 방향을 바라본 모습.

갯골을 따라 하얀 덩어리 하나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맨눈으로는 잘 안 보이는 거리. 카메라 렌즈를 겨눴다. 넓적한 부리로 비질을 하듯이 왼쪽 오른쪽 저어가며 전진하는 모습이, 온몸으로 “나는 저어새다” 하고 말하는 듯했다. 천연기념물 제205-1호, 멸종위기 1급 저어새다.

2021.10.12. 저어새.

저어새는 아주 성실했다. 이쪽 골짜기의 끝까지, 그러니까 울타리 바로 앞까지 와서는 잠깐 쉬었다가 바로 고개를 돌려 반대방향으로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 줄기를 다 저었으면 다른 골짜기로 자리를 옮겨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마루로 올라오는 것도, 한 골짜기 청소를 다 끝내고 쉴 때, 아니면 잠깐 ‘볼 일’을 볼 때뿐이었다. 이따금 입을 벌려 뭔가를 넘기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봐선 뭔가 먹을 게 있는 모양인데, 뭘 먹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2021.10.12. 볼 일을 본 저어새.
2021.10.12. 호다닥~
2021.10.12. 저어새와 갯벌.

그를 처음 본 게 오후 세 시쯤의 일인데, 해 질 녘이 되도록 좀처럼 사냥이랄까 식사랄까 하는 그 일과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여름 철새인 저어새에게 10월은 남쪽 따뜻한 곳으로 이주하는 시기라서 그런 걸까? 배를 든든하게 채워 놔야 중간에 곤란한 일을 겪지 않을 테니까. 그게 맞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다.

환경부에 따르면 저어새가 가장 많이 번식하는 지역이 바로 한반도 서해안, 특히 경기-인천 지역이라고 한다. 송도 근처의 남동유수지나 화성 근처, 그리고 영종도 수하암 등이 주요 번식지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서 수하암은 정서진에서 아주 가깝다. 이 녀석은 수하암에 머물다가 여기까지 나온 게 아닐까. 물론 근거는 없는 단순 추정일 뿐이다.

2021.10.12. 넌 누구니? 도요새 종류인가?

잠깐 간식을 먹고 나오니 슬슬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드는 시각이다. 저어새는 그 때까지도 식사에 열중이었다. 한 번 청소한 자리도 다시 살펴 부리를 젓는 꼼꼼함이 인상적이다. 풍향이 바뀌었는지, 착륙하려는 비행기들도 아까와는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다. 한껏 노래지던 하늘은 다시 점점 붉은 기운을 올려 갔다. 바닷물이 갯벌을 서서히 덮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평일의 휴일이 지고 있었다.

2021.10.12.

며칠 뒤, 한반도의 기온이 갑자기 초겨울마냥 뚝 떨어졌다. 저어새는 남쪽으로 떠났을까?

2021.10.12. 뭐

@Bokthe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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