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창작과 장작 사이

[소설/단편] 단독 아이템

길고양이. 본문 내용과는 관계 없음.

“탁”

내지는 “탕”

혹은 둘 사이 어딘가.

경쾌한 키보드 소리와 함께, ‘전송 중’이라고 적힌 조그만 창이 떠올랐다. 그 안에 수평으로 누운 흰 막대를 파란색이 왼쪽부터 채워가기 시작했다.

K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말했다.

“말씀하신 것 수정해서 송고했습니다.”

어, 그래, 수고했어,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 끝났다. 뭐가 끝났냐면, K가 무려 석 달에 걸쳐 취재해 온 기획기사 작성이 끝났다. 도교육청이 추진하는 글쓰기 교육의 실태를 짚고 해외 사례를 곁들여 더 나은 해법을 제시하는 기획이었는데, 마지막인 5편을 이제 마무리한 것이다. 부장이 데스킹 중에 조금 까다롭게 굴었지만, 어쨌든 이건 끝났다. 3381자, 200자 원고지 환산 12.9매로, 대판신문 한 면에 5단 광고를 깔고 사진 가로 3단짜리 큰 걸로 하나, 1단짜리 작은 걸로 두 컷을 받치면 딱 맞는 분량. 송고된 기사는 6면 편집자인 P 선배에게 넘어가, 적당한 제목을 달고서 내일 자 신문에 찍혀 나올 것이었다. 물론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라는 문구도 빠뜨리면 안 된다.

K가 일하는 신문사는 그 지역 일간지 중에서는 공신력을 꽤 쳐주는 편이었다. 3년 차로서 슬슬 햇병아리 티를 벗고 있는 그는 지역 내에선 그럭저럭 평판이 좋은 기자였고, 이제는 그를 따르는 후배도 생겼다. 특히 도교육청 기자실 옆자리를 쓰는, 경쟁사의, 이제 막 수습을 뗀 L 기자는 “선배, 선배” 하며 이것저것 묻고 가끔 차도 얻어 타고 커피도 얻어 마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K는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선배는 그런 것이니까.

K가 양손 깍지를 끼고 위로 쭉 뻗었다. 눈은 감은 상태였다. 6면은 넘겼고, 4면은 아까 4매짜리 하나랑 단신 하나 했고, 가만있어 보자… 이제 할 게 뭐 남았지? 더 없나?

아무래도 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마우스패드 오른쪽에 대충 서 있는 텀블러를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글을 쓸 것이다. 물론 기사도 글이니까 지금까지 계속 글을 쓰긴 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나만의 글’을 쓰고 말 것이다. 오랫동안 생각해 둔 ‘개쩌는 글감’을 풀어놓기만 하면 나도 ‘알티스타’가 될 수 있다.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18.9L들이 먹는샘물통을 꽂은 냉온수기 앞에서 카누 한 봉을 뜯어 텀블러에 쏟았다. 온수를 대충 200mL 붓고, 이어 냉수를 50mL쯤 부었다. 시각은 6시 22분, 퇴근길 정체가 풀리려면 한 40분쯤은 사무실에서 삐대도 될 것이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K는 아주 자신만만했다. 머릿속에 엄청난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건 정말 기발해서,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도 들려줄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완벽한 플롯이 잡혀 있었고, 그걸 그대로 글자로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글 쓰는 것만큼 자신 있는 일은 없었다. 글 쓰는 게 직업인데!

그런데 자리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얹은 순간, 그 모든 생각이 민들레 홀씨 되어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생각을 좀 하자, 생각을. 입에서 가느다랗게 한숨과 쌍시옷이 흘러나왔다.

그 자세로 5분쯤 앉아 있다가, 불현듯 내일 자 취재 아이템 메모를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래, 급할수록 돌아가랬지. 메모만 올리고 다시 하자. 그러나 메모를 쓰는 동안, 그런 결심조차도 잊어버렸다.

K는 결국 쓰려고 했던 글은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퇴근했다.

사무실이 어수선해서 그래.

지난 두 달 동안 ‘시간만 나 봐라’ 하면서 별렀던 글감이었지만 따로 메모를 해두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시간이 없긴 없었다. 기획 취재를 하느라 서울이며 대구며 울산이며 전국 곳곳을 돌았고, 해외 사례를 살펴보러 이 시국에 일본에도 다녀왔다. 원래는 ‘바칼로레아’로 유명한 프랑스를 다녀오고 싶었지만 취재비가 모자라 바꾼 것이었다. 출장 일정을 마무리하고는 기사 작성과 보강취재를 계속해야 했고, 대학 입시 정책과 같은 이슈들이 계속 터졌으며, 최근엔 또 회사에서 주최한 중·고교생 NIE 공모전과 관련한 서류 작업을 하느라 바빴다. 근로기준법이 지엄해도 일할 사람이 없는데 K가 도망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주 52시간을 넘기진 않았다.

뭐, 집에 가서 천천히 생각해보면 또 떠오르겠지.

K가 모는 경차는 과속 단속카메라를 지나쳤다. 시속 60km 제한 도로였고, K의 통과 속도는 시속 68km였다. 그는 가속 페달에서 잠깐 뗐던 발을 다시 지그시 눌렀다. 그 순간, 다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맞다! 그거였지!

K가 벼르던 바로 그 ‘개쩌는 글감’이었다.

메모, 메모해야 하는데.

그러나 그는 운전 중이었고, 그의 자동차는 자율주행차가 아니었다. 갓길에 잠깐 차를 세워두고 적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는 편도 4차선 도로의 2차선을 달리고 있었고, 오른쪽 옆거울엔 상향등을 땡기며 속도를 붙이는 중형차 한 대가 보였다. 펜을 꽂아놓은 수첩은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었다. 아, 이러다 잊어버리겠네, 또. 얼른 집에 가서 적어놔야지.

하지만 K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겉옷만 대충 벗어 던져놓고서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가로로 잡았다. ‘영원한 7일의 도시(주: 모바일 게임 이름)‘ 이벤트 기간이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역시 아사나(주: ‘영원한 7일의 도시’에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가 최고다.

***

또로로로로.

냉온수기 빨간 꼭지에서 뜨신 물이 나왔다. 물은 뼈다귀처럼도 보이고 아령처럼도 보이는 비비드한 버건디 컬러 텀블러로 쏟아졌다. 미리 두 봉 뜯어 부어 놓은 동결건조 커피 가루가 순식간에 녹아들어갔다.

또로… 똑… 똑….

아, 물이 떨어졌구나.

K는 텀블러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빈 물통을 냉온수기에서 분리했다. 그 동작이 마치 머리를 뽑아버리는 것 같은, 기괴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는 뽑는 것보단 베는 쪽이 좀 더 공화주의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며, 테이블 아래의 새 물통을 들어 올렸다.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 우유당번과 미술실 준비물 당번을 해왔으니 이 정도 무게쯤은 간단히 들 수 있다.

꼴, 꼴, 꼴, 꼴, 꼴록….

고요한 금요일 오전. 편집국 사무실엔 아무도 없고, 오늘은 딱히 할 것도 없다. K는 당직 근무를 위해 나왔고, 그의 신문사는 토요일 자를 찍지 않으니 아무도 없는 게 당연했다. 아마 옆 사무실 디지털국 사람들은 출근했겠지만.

텀블러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허리를 뒤로 젖혀, 의자 등받이를 한껏 밀었다.

뭘 한담.

아, 그래. 쓸 게 있었지.

아래아한글을 열었다. 커서가 깜빡였다. 이건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니까, 역시 첫 문장부터 임팩트 있게 가야 해. 기사도 리드문장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서 써야지.

– ㅁㄴㅇㄻㄴㅇㄻㄴㅇㄻㄴㅇㄹ.

– ㅁ;니아러아님;니아러아님;니아러아님;.

하, 뭔가 기깔나는 게 있을 텐데.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주: 소설 <혼불>의 첫 문장)“처럼 콕콕 박히는 문장으로 시작해야 술술 내려갈 텐데.

– 눈을 떴을 때,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이건 너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

– 인간들이 싫어요(주: 영화 <아수라>의 첫 대사).

이런 느낌이면 좋겠긴 한데, 역시 영화에 나온 대사를 베끼는 건 좀 아니지. 전반적으로 풍자의 느낌을 살려야 하니까 너무 딱딱하지 않게 가야겠는데.

뜌류류류류류. 뜌류류류류류.

전화벨이 울렸다. K는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별 표시를 눌러 당겨 받았다. 중년 남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교적 낮고 굵은 목소리가 넘어왔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전화했슴다.”

“예예. 어떤 기사를 보셨나요?”

“오늘 자 신문 4면을 딱 봉게요,”

“예예.”

“아니, 신문기자가 맞춤법을 틀려갖고 이게 되겄습니까?”

“네 선생님, 어느 부분을 보셨는지요?”

“아니 기자 양반, 그냥 보면 몰르요? 제목 봐보쇼. 기관 청렴도 3위 등극. 아니 세상에, 3위에 ‘등극’이라는 말을 쓰는 양반이 어디가 있소? 응?”

3위. 등극. 분명히 제목에 명조 18pt 활자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바이라인엔 K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K가 단 제목은 아니다. 어제 4면 편집자가 누구였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예, 이건 오류가 맞네요,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그게 다가 아니요, 기자양반. 5면에도 함 봐보쇼. 제일 위엣 기사 본문에. ‘겨례’가 뭐요, ‘겨례’가? 이거 완전 독자에 대한 결례 아뇨? 아, 예예, 죄송합니다, 선생님.

K는 표시를 좀 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잠시만요, 말씀하신 것들을 정리 좀 하겠습니다. 수화기를 왼손에 든 채로 K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꼬여 있던 선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노트북을 건드렸고, 노트북은 커피 가득한 텀블러를 건드렸고, 텀블러는 품고 있던 커피를 쏟아냈고, 노트북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단 이 X된 상황, 수습할 방법부터 찾아야 했다.

그 사이에 그의 머릿속에 있던 ‘개쩌는 글감’은 멀리 날아갔다.

***

멀리 날아간 글감이 머릿속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보름쯤 뒤였다. 평일 아침이었고, 교육청 정례 브리핑이 한참 진행 중이던 순간이었다. K는 다리를 달달 떨었다. 내용이야 어차피 브리핑 전에 다 캐놓았고, 부족하면 나중에 부연을 요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일단 빨리 끝내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이상으로 정례 브리핑을 마칩니다. 기자님들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그러니까 논술뿐 아니라 글쓰기 전반에 대한 거죠, 이게?”

저기 선배, 그거 자료에 다 나와 있다고요.

“예, 그렇죠.”

“그럼 학교 현장엔 언제부터 적용되는 건가요?”

“어… 우선 자유학기제와 연계해서 2020년에 중학생들 대상으로 먼저 실시하고요, 그리고 성과를 봐서 고등학교로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까지 확대하는 건 시기가 픽스된 건 아닌 거네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늦어도 2022년까지는, 어, 그러니까 우리 교육감님 임기 내에는, 하하, 도내 중고교에 전부 적용하겠다, 그런 방침입니다. 혹시 또 질무운-이… 아, 없으시군요. 그럼 이제 식사하러 가시죠.”

주무관이 멋쩍게 웃으며 말하자, 기자실이 화기애애해졌다. 주무관을 따라나서는 이가 칠할 정도 되었고, 통신사 기자 두어 명은 마감을 치고 있었다. K는 노트북 가방에 자료를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도 식사하러 가시죠?”

L 기자였다. K는 아, 선약이 있어서… 하며 손사래를 쳤다. 사실 선약은 없었다. 단지 마음이 급해졌을 뿐이었다. 이번엔 다행히도 메모를 좀 했다. 지금 편집국 사무실에 들어가면 오전 당직자 한 명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가자. 가서 쓰자. 이번에야말로.

20여 분을 달려 편집국 사무실에 들어서자, 동기인 문화부 C 기자가 인사했다. K는 손을 흔들면서 그를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을 꺼내는데, C 기자 자리에 쌓여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 오늘 책 기획이지?”

“어. 200쪽 더 읽어야 되는데 눈이 빠질 것 같어.”

“이거 마감 가능한 거야?”

“몰라, 몰라.”

K는 피식 웃으며 책 탑의 최상층에 있던 책을 집었다.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글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는 젊은 작가의 소설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124쪽을 펼쳤다.

어, 그런데 이거, 잠깐만.

허둥지둥 노트북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갈겨 적은, 메모 아닌 그 메모를 바라보다가, 다시 책을 펼쳤다. 그렇게 수 차례 시선을 옮기던 K는, 10여 분이 지나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역시 ‘개쩌는 글감’이라는 것은 누군가 이미 생각했던 것이고, 단지 K가 그걸 몰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K는 그다지 슬프거나 허탈하지 않았다. 쓰지 않았을 뿐이지, 쓰기만 하면 진짜 대박이 날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감추고 있던 엄청난 힘을 해방하려면 역시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었다.

@Bokthe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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