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불명의 복선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카메라가 찍어준 사진

가자, 양곤, 평택항, 물류센터, 강남역 10번 출구, 금남로에 평화를

각자 힘의 차이 엄존… 섣불리 대등하게 다루면 위험
‘충돌’ ‘전쟁’ ‘싸움’ 등 명명, 피해자에게 짐 지우는 일
19일은 부처님오신날… 세계 곳곳 평화와 안녕 기원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소인도 동감이오. – 메이링 치올(로드 오브 히어로즈)

2021.05.13. 균형감각이 뛰어난 왜가리.

취재와 보도를 하면서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야 다들 아는 얘기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아, 솔직히 이건 좀 너무했다’ 싶을 때가 종종, 아니 자주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A가 B를 한 대 때리고, B는 A를 다섯 대 때렸다. 이것을 ‘둘 다 때린 것은 똑같다’면서 똑같이 취급할 수 있을까? 사실관계를 따지자면야 이건 좀 명쾌한 편이다. 누가 봐도 한 대 때린 것보다 다섯 대 때린 것이 더 큰 잘못이니까. 이 ‘사실관계’에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가령 A는 한 대만 때렸지만 그 한 대가 급소를 매우 강하게 타격한 것이라면? 또는, 만약 A가 B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는데 쌓이고 쌓여서 어느 날의 ‘한 대’에 마침내 B의 울분이 폭발한 것이라면? 이런 ‘서사’가 붙으면 이해가 조금 쉬워지지만, 물론 그 서사가 ‘진실’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균형 보도’를 고민할 때 끊임없이 돌고 도는 쳇바퀴다.

무슨 ‘전정사상’이니 ‘평행세계’니 하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면, 일어난 사건은 하나다. 그러므로 ‘객관적 진실’도 하나다. 그러나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최대한 많은 증거와 정황과 맥락을 모아 해석하고 판단할 뿐이다. 저널리즘의 기초에 대해 배울 때, 단지 대립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기계적으로 배분해 싣는다고 해서 ‘균형 보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다. 각 주체의 권력이 다르고, 발언이 갖는 힘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각자가 하는 말의 진실성과 의도와 이것저것 기타 등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언론중재위원회 가기 귀찮으니까 대충 1대 1 기계적으로 다루면 골치는 덜 아프겠지만,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그건 언론이 아닐 것이다. ‘진실’에 이를 수는 없지만 최대한 ‘진실’에 가까워지도록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2021.05.13. 청계천에서 멍 때리는 해오라기.

이스라엘 정부군이 연일 팔레스타인인 거주지역에 대해 공습을 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한국어로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상당수가 이 사건을 ‘충돌’ 내지는 ‘전쟁’으로 표현하고 있다. ‘충돌’은 ‘서로 맞부딪치거나 맞섬’이라는 뜻(표준국어대사전)이고, ‘전쟁’은 ‘국가와 국가또는 교전(단체 사이에 무력을 사용하여 싸움’이라는 뜻(표준국어대사전)이다. 두 표현은 각 주체를 ‘대등한’ 관계로 전제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사건을 ‘싸움’으로 명명하면, 피해자는 가해자가 져야 할 짐의 절반을 영문도 모른 채 나눠 지게 된다. 이렇게 써도 괜찮은 걸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고립과 배제와 공포를 없는 셈 쳐도 괜찮은 걸까? 하마스가 로켓을 쏜 이유는 무엇인지, 이스라엘 유대인 정부는 왜 저렇게까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지, 20세기 초 이곳에 문제의 원인을 심어 놓은 영국 및 유럽 강대국들은 왜 뒷짐만 지고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되는 걸까? 알 자지라와 AP 등 언론사들이 입주한 건물이 폭탄 몇 발에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무너진 집에서 금붕어를 구해 나왔다며 웃는 어린이들을 보고,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이 소셜미디어에 ‘팩트체크’라며 올린 몇 컷의 카드뉴스를 본다. 무슨, 거대한 부조리극 같다.

2021.05.13. 청계천 연등.

어쩐지 소망할 것이 참 많은 시절이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올해도 청계천에 연등이 설치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인지 규모는 이전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온갖 캐릭터가 총출동했던 전과는 달리 불교 상징물 위주로 설치돼 있어 낯익은 얼굴을 찾는 재미는 조금 덜하다. 그래도 이렇게 해마다 달라지는 형형색색 등을 보자면 자연스럽게 평화와 안녕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된다. 등이 상대적으로 수수해진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외려 올해의 등이 조금 수수한 편인 것이 “희망과 치유”라는 주최 측의 메시지에 더 충실한 것 같다. 역시 미의 궁극은 단순함이다. 청계천 명물(?) 왜가리가 상류까지 올라와 등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신기한 건지 불쾌한 건지는 당사자에게 물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2021.05.13. 왜가리가 왜 가니?

 

2021.05.13. 청계천 연등.

14일엔 퇴근 후 조계사를 찾았다. 지붕이라도 올려놓은 듯 머리 위를 가득 메운 연등과 그 연등의 가운데를 푹 찌르고 들어간 아름드리 회화나무의 ‘그림’은 보고 또 봐도 압도적이다. 조계사에서 밝혀진 연등 불빛은 바로 옆에 있는 우정국 건물까지 이어진다. 햇빛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고 등의 불빛이 또렷해졌다. 우정국 앞에 설치된 등불 터널도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전통 등 전시회’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연등회, 한국의 등불 축제’라는 이름으로 지난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고 한다. 한지로 만든 각양각색의 등에 각자의 소망이 걸렸다. 많고 많은 소망 중에서 “미얀마에 자유, 그리고 희망을…”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2021.05.14. 조계사 연등과 회화나무.

 

2021.05.14. 우정국 앞 연등 터널.

 

2021.05.14. 우정국 앞 연등 터널에 달린 미얀마 민주화 항쟁 응원 메시지.

다시, ‘균형’에 대해 생각한다. 정의에 무게를 더하지 않으면 불의 쪽으로 저울이 기울고 만다는 이치를 떠올린다. 그리고 가자의, 동예루살렘의, 양곤의, 만달레이의, 평택항의, 물류센터의, 강남역 10번 출구의, 광주 금남로의 삶을 생각한다. 평화를 빈다. 평화를 빌자.

@Bokthe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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