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내란, 그 기록들: 2025년 3월, 절정 (@ 광화문, 남태령)

법률적 탈옥. 그 사태에 대한 여러 정의(definition) 중에서 내가 가장 적확하다고 생각한 표현이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에 대한 구속 기소가 이뤄지면서 당분간은 그가 사회의 공기를 마시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완전한 오산이었다. 3월 7일, 그의 구속취소 청구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
페미니즘 뉴스레터 ‘플랫’의 5주년 생일카페에 들러 3·8 세계 여성의 날을 함께 축하하고서 사무실로 가던 길, 막 도착할 무렵이었다, 그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 이튿날, 평소보다 한참 많은 인원이 광화문 앞에 모였다.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뛰쳐나온 이가 많은 듯했다. 그런 광장의 목소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집회가 한창 진행되던 그 늦은 오후에, 결국 검찰이 즉시항고를 포기하고 윤석열에 대한 석방을 지휘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최악의 안티페미니스트 정치인 중 하나였던 윤석열의 ‘법률적 탈옥’이, 하필, 세계 여성의 날에 벌어진 것이다.

3월 둘째 주 정도면 대통령이 파면되고 내란도 그렇게 종식될 수 있겠거니, 그런 생각은 지금 보면 너무 안일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법률적 탈옥’ 직후, 광화문 앞에는 천막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비상행동 의장단은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시민, 정치인들의 동조 단식도 이어졌다. 3월 15일에는 100만 명이 나와 윤석열 파면을 외쳤고, 18일에는 폭설이 쏟아졌으며,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헌재는 선고기일도 잡지 않고 장고에 들어갔고, 대통령 권한대행 최상목은 거부권, 거부권, 임명 보류, 거부권… 이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15일엔 일하느라, 22일엔 아끼는 후배의 결혼식에 가느라 광장에 나가지 못했다. 그 외에는, 그렇지, 답답한 마음에 농성장에 나가 앉아있다 들어오기도 했고, 퇴근 후 평일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광화문 앞 대로 전 차선을 열어 행진해도, 수많은 응원봉이 저마다의 빛으로 넘실대도, 불꽃남자 정대만이 빛을 뿜으며 일렁여도, 데뷔 못하면 죽는 병에 걸린 인물이 속한 아이돌 그룹의 이름이 반짝여도, 플루트를 비롯한 여러 관악기가 하모니를 이뤄도, 헌재고 권한대행이고 뭐 하나 응답하는 게 없었다.
그런 진지전의 와중에, 또 하나의 대첩이 다시 한번 남태령에서 재현된다. 3월 25~26일의 일이었다. 신속한 파면 결정을 촉구하며 서울로 오던 농민들의 트랙터를, 정확히 말하면 트랙터를 싣고 오던 트럭들을, 작년 동지 때처럼 경찰이 막아선 것이다. 법원은 ‘트럭’의 통행을 최대 20대 허용했으니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경찰이 통행을 막을 근거는 없지 않은가? 서울시장 오세훈까지 나서서 “트랙터의 서울 진입은 절대 불가하다“라고 난리를 피우는데 그럴수록 ‘아, 무조건 뚫어야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지 않았을까?
‘1차’ 남태령 대첩 때와 정확히 같은 전개였지만, 상황은 좀 더 좋지 않았다. 극우 세력들이 몰려와 남태령역 출입구에서부터 시민들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극우 유튜버들은 아주 신이 나서 촬영하고 조롱하고 욕하고 그러고 다녔다. 어떤 유튜버가 경찰과 뒷거래를 하는 듯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평일 낮이라 수적으로도 쉽지 않아 보였다. 오랜만에 본가에 들렀다 돌아온 25일 오후, 집에 들러 짐 내려놓고 옷 갈아입고서 곧바로 남태령으로 향했다. 작년 동짓날에 그곳에 있지 못했던 것에 대해 일종의 속죄를 하는 마음으로. 조금 늦기는 했지만.
남태령역에 도착하자마자 현장의 지인이 만두를 사다 달라고 했고, 영업을 종료하기 직전인 동네 만두 가게에서 만두를 사다가(내가 마지막 손님이었던 것 같다) 들고 집회 장소로 이동했다. 경찰 버스와 바리케이드가 길목 길목을 완전히 차단했고 그 사이에 딱 한 사람 지나갈 정도의 길만 트여 있었는데, 그 바리케이드 너머에서는 윤석열 지지자들이 성조기를 흔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깃발이나 응원봉 같은 상징물이 있든 없든 일단 “빨갱이” “공산당” 하면서 욕하고 보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런 ‘에스코트’를 받으며 미로 같은 길을 빠져나와 당도한 집회 장소에는 이미 수천은 될 것 같은 시민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급조된 집회였기 때문에, 무대는 1톤 트럭의 짐칸, 집회용 장비들도 광화문 앞에서의 그것에 비할 바 못 됐다. 대열 중간부터는 무대의 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낮에는 땀을 뻘뻘 흘려야 했을 정도로 3월 치고는 더운 날이었는데, 해가 지고 밤이 되자 슬슬 쌀쌀해지더니 하나둘씩 반짝반짝 은박 담요를 뒤집어쓰기 시작했다. 3월 말에도 이렇게 추운데 대체 동짓날에는 어떻게들 버텼을까, 나로서는 영원히 그 빚은 못 갚겠구나,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이번에도 광장 밖의 수많은 시민들이 물품을 보내왔고, 자원봉사자들이 쉴 새 없이 “초코파이 드실 분~” “핫팩 필요하신 분~” “물 필요하신 분~” 하면서 광장 안의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다녔다. 남쪽 길을 뚫어낸 난방버스가 열 대가 왔고, 감자튀김 등 음식을 나눠줄 트럭도 속속 도착했다. 대열은 계속 길어졌고, 지하철 막차가 끊길 무렵이 되자 대열 끄트머리가 남태령 고갯길 정상에 거의 닿을 정도가 됐다. 평일인데도. 그 새벽에도 깃발들은 나부꼈고, 응원봉 파도가 넘실거렸다. 확신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 싸움은 무조건 우리가 이긴다고.
다음날 아침, 트랙터 한 대가 우회해서 경복궁 앞 진입에 성공했고, 경찰은 우악스럽게 견인하고 시민들을-단식 농성 중이던 국회의원까지도- 폭력 진압했다. 남태령에 있던 시민들이 곧 몰려갔다. 체력이 다한 나는 누군가 나와 바통터치를 해주기를 바라며 집에 들어와 누워야 했지만, 수많은 시민들의 연대의 힘으로 우리는 마침내 트랙터를 되찾는 데 성공했고, 트랙터의 위풍당당한 행진을 볼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대첩으로, 3월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남은 것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승리뿐. 그럴 수 있다고, 분명히 믿고 있었다.






@복
저는 만두, 국수, 두부를 순서와 상관없이 제일 좋아합니다. 글에서 만두가 나와 덩달아 좋습니다. 겨울, 남태령대첩을 지켜보며 함께하지 못해 송구한 맘이 먼저 들었답니다. 아무튼, 덕분에 이런 글을 남기게 돼 감사합니다.
2025년 노동절에 분탕질 치며 정신없었지만, 다시 남태령대첩이 꿈뜰해서 확 바꾸길 정말 앙망합니다.